지난 연말 남극의 세종과학기지 조난사고 소식은 많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지구의 극지에서 외로운 과업에 헌신하다 희생된 전재규 연구원의 죽음은 애석한 일이다. 목숨을 잃은 고인이나 유족에겐 어떤 보상도 허무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이 세상의 공론대로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면 한 연구원의 희생이 ‘국가와 과학의 관계’를 격상시키는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남극과 독일의 ‘귀한 한국인들' ▼
특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남극의 얼음 세계에서 51시간 만에 구조된 동료들이 귀국을 고사하고 “남아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한 말이다. 이건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는’ 식의 옛 한국인이 아니라 새로운 한국인이다. 아니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던 8세기에 인도를 찾아간 혜초, 그보다 다시 200년 앞서 6세기에 뱃길로 인도를 다녀온 겸익(謙益) 법사와 같은 ‘본래의 한국인’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성탄 전야 러시아 여행의 귀로에 하룻밤 들른 베를린에서도 좋은 얘기를 들었다. 교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프랑크푸르트시 당국에 한인학교 설립을 신청했더니 주(州)정부 총리가 완강하게 반대하더라는 것이다. 독일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이 다 빠져나가면 독일 아이들의 경쟁심이나 학력이 급격히 저하될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한편 베를린의 음악 팬들에게는 지난해 10월 도이치 오페라에서 조수미가 불렀던 ‘호프만의 연가’가 아직도 화제다. 귀국 기내에서 ‘남독 신문’을 보니 뮌헨의 유서 깊은 ‘헤라클레스홀’에서 열린, “세계적 출세가도가 예정되었다”는 장한나의 연주회 평도 눈에 띈다. 조수미나 장한나나 순 국산의 세계인이다. 연초의 국내 신문에는 ‘한류’란 이름으로 한국문화의 세계 진출에 앞서 가는 많은 젊은이들의 기사가 붐빈다. 모두 귀한 한국인들이다.
귀(貴)란 무엇인가. 귀는 수(壽), 부(富)와 함께 오랫동안 한국인이 추구한 복(福)의 한 정점이다. 원래 부나 수가 물질적 신체적인 것이요, 양(量)적인 것이라면 귀만은 정신적인 것, 질(質)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선 이러한 귀를 오랫동안 높은 벼슬, 곧 감투와 동일시해 왔다. 노래를 잘해도, 그림을 잘 그려도, 달리기를 잘해도 최고는 으레 대통령상이나 장관상쯤 타야 하는 것으로 봤다. 상아탑의 세계에서도 학문의 업적보다 감투가 더 귀한 것으로 여겨 총장 선거마다 혼탁상을 빚고 있다. 한국사회를 꿰뚫는 가치관의 일원화(一元化) 현상이다.
나는 지난 세기의 80년대부터 21세기에는 한국문화가 일대 르네상스를 맞을 거란 예언을 해 왔다. 1960, 70년대에 이룩한 경제발전과 80, 90년대에 성취한 정치발전의 토대 위에서 21세기에는 15세기, 18세기에 이어 한국문화의 제3의 중흥기를 꽃피울 문화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언이었다.
연말 연초에 남극에서부터 헤라클레스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젊은이들의 소식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새로운 문화중흥을 위해 ‘오늘 무엇이 귀한 것이냐’는 본원적인 물음에 가장 확실한 대답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중흥을 위해선 경제적 가치(재력), 정치적 가치(권력)에 못지않게 문화적 가치를 귀하게 보는 사회적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돈과 벼슬만을 최고라 믿는 사회에서 문화는 착근할 토양이 없다.
▼우리 문화 ‘제3의 중흥기’ 기대 ▼
요즘 젊은이들은 많은 월급보다 많은 여가시간을 주는 직장을 선호한다고 한다. 대학생들조차 교육부 장관의 이름은 몰라도 유명한 체육인 연예인 이름은 꿰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권력이동’에 앞서 ‘가치관의 이동’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이 점에선 노무현 정부의 기여를 외면할 수 없다. 지금까지 최고의 귀로 여겨 왔던 가장 높은 벼슬을 노 대통령은 결정적으로 격하하는 데 기여하고 있고 그의 한 각료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영화감독에 비해 장관이란 벼슬이 얼마나 ‘빛바랜 귀물’인지를 몸으로 보여 주고 있다. 두루 고마운 일이다.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