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내 게임방에서 손동현 교수(왼쪽)가 한지희씨에게 “‘자기동일성’이란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를 막론하고 자신의 다양한 활동들이 결과적으로 ‘내가 되려고 하는 나’에 얼마나 가까이 가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강조했다. -강병기기자
《‘젊은 리더를 위한 민주시민강좌’의 첫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나’의 자아정체성)이다. 한국인들이 사이버공간에서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진화시키고 있는 PC방을 이야기의 장소로 잡았다. 성균관대 철학과 손동현 교수(57)와 같은 과 4학년생인 한지희씨(25)가 성균관대 교내 PC방에서 롤플레잉(role playing) 게임인 ‘리니지’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켄트 성’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캐릭터들과 혈맹을 맺으며 생사를 걸고 전투를 벌이는 전사가 됐다.》
▽손동현 교수=이거 쉽지 않군. 뭐 교수라고 봐주는 것도 없네.
▽한지희씨=죄송합니다. 게임은 게임이지요.
▽손=게임에서는 평소의 한군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군. 예의 바르고 신중하던 성격 이면에 이런 공격성이 숨어 있는 줄은 몰랐어.
▽한=어차피 다른 환경에서 다른 캐릭터로 나섰으니 현실에서 못 해보는 역할을 한번 신나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때론 어떤 것이 진짜 저의 모습인지 조금 혼란스러울 때도 있어요.
▽손=그건 한군이 그래도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는 증거야. 그런데 사이버공간에서의 ‘자아정체성’은 현실과 달리 아주 임의적이고 우발적으로 조작된 거지. 자기 캐릭터를 쉽게 바꾸거나 심지어 팔아치우기도 하지 않나. 단 한 번뿐인 현실공간의 인생까지 그렇게 무책임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이네.
▽한=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갖고 살아가지 않나요? 다중(多重)적 자아가 있다고 해서 자기정체성이 깨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리니지’ 속의 전사, ‘바람의 나라’ 속의 주술사,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아들…. 조금 혼란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의식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한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동일한 자아’가 물론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건 아니지. 다양한 ‘얼굴’들이 하나의 자기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나쁠 것도 없고 실제로 인간에게는 당연한 일이기도 해. ‘자기동일성’이란 건 현재의 자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들이 결과적으로 ‘내가 되려고 하는 나’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지.
▽한=그런데 왜 사람들에게 자기동일성이 필요할까요?
▽손=‘존재의 원리’가 본래 그런 것 아닐까? ‘오늘의 내가 꼭 어제의 나와 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인격분열증 환자나 인격 파탄자가 되고 말겠지. 물론 자기동일성 내에도 다양성은 있어야 하지만, 어제까지는 민주투사였던 사람이 오늘부터 민주투사를 때려잡는 일에 앞장서려 한다면, 이는 자기동일성의 큰 틀을 깰 정도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이런 경우 ‘배신자’ 또는 ‘거짓말쟁이’라고 해. 거짓말하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훼손하는 지름길이야. 이 때문에 어느 문화권에서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가 도덕률의 으뜸으로 나오는 것이지.
▽한=때로는 사이버세계의 가치와 현실세계의 가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역할들 사이에 혼동이 생기기도 하죠. ‘리니지’ 게임을 하다가 궁지에 몰리자 현실에서 돈을 주고 무기를 산다든가, 상대 캐릭터의 인물을 실제로 찾아가 살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을 정도니까요.
▽손=아무리 사이버 캐릭터 속에 몰두한다고 해도 게임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입으로 먹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화장실도 가야 하지 않나? 사이버세계도 그 기반은 현실세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하지만 사이버세계의 자아는 전혀 다른 조건 속에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해. 사이버세계의 문제를 통제하려고 법률을 제정하지만, 현실세계의 법으로는 사이버세계를 규제할 수 없지. 법이란 것은 결국 물리적 제약을 가하는 것인데 사이버세계는 이미 물리적 통제가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이야. 결국 전인교육을 통해 모든 개개인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할 줄 아는 자아를 갖도록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생각하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강의요지/자아정체성이란 ▼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사는 것, 나를 외부의 노예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 나의 나됨을 온전히 확보해 충실히 실현시키는 것, 이것이 나의 ‘주체성’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나의 자기동일성’ 원리를 기초로 한다. 주체성을 회복한 자아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구체적 연관 속에서 자신이 자신을 결정하는 것, 즉 ‘자유’다. 자아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기성품이 아니다. 나 자신에 의해 이제부터 형성돼야 할 존재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망’이요, 나의 ‘목적’이다. 나의 아바타가 진정 나를 구현하는 존재가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끊임없이 나의 돌봄을 받으며 가꾸어지고 성숙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유의 대가는 무엇인가?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책임’이고, 정서적 관점에서 보면 ‘고독’이다. ‘책임’은 주체적 실존이 ‘타인’에 대해 갖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고독’은 주체적 실존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러면 나는 ‘자유의 공간’ 속에서 어떻게 나를 형성해 나가는가? 인간은 행위의 목적을 ‘있어야 할 세계’, 즉 가치에 둔다. 그리고 수단을 강구해 그 목적을 달성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렇듯 ‘목적 활동적’이다. 가치 있는 것을 목적으로 설정할 때 현실을 흐르는 실재시간을 뛰어넘어 인간정신은 미래로 비약한다. 그리고 그것의 달성을 위한 수단을 강구할 때 인간정신은 실재시간을 역방향으로 거스르면서 인과관계를 ‘역산(逆算)’한다. 실재시간상 가장 나중에 올 것이 먼저 올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사실의 왕국과 가치의 왕국 모두에서 국적을 갖고 있는 ‘이중 국적자’요, 논리적으로 모순된 존재다. 그러나 이 모순을 삶 속에 용해하는 초월의 수행에서 자기정체성을 이룩해 나간다.
손 동 현 성균관대 교수·철학
▼佛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좌 ▼
2001년 3월 28일 오전 11시.
‘프랑스 지성의 전당’으로 불리는 파리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계단강의실. 검은색 가방을 든 노(老) 석학이 등장하자 시끄럽던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현대 사회학의 거두이자 평생을 약자 편에 서서 권력에 항거해 온 프랑스 최고의 지성 피에르 부르디외(당시 71세)의 마지막 강의였다. 1982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재직한 그의 이날 강의 제목은 ‘부르디외가 본 부르디외’.
부르디외 교수는 강의 내내 자신을 3인칭의 ‘그’라고 부르며 ‘그’의 학문여정과 지식편력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강의가 끝나자 60대 노인부터 20대 대학생까지 400여명의 청중은 기립박수로 떠나는 노 석학에게 ‘오마주(Hommage·경의)’를 표했다.
부르디외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개방강좌였다. 1530년에 설립된 전통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는 무료로 일반에 공개된다.
당대의 석학들이 모인 최고학문기관의 강의를 특정 엘리트 집단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인문 사회과학 강좌에 중고교생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생각하는 교육’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 철학 논술시험은 프랑스어와 함께 가장 배점비율이 높다.
프랑스의 이런 전통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2000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366일(2월이 29일)간 계속된 무료 시민강좌. 프랑스는 새 밀레니엄을 맞아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366개의 강좌로 정리했다. 이 행사를 기획했던 이브 미쇼 파리1대학 교수(철학)는 “지식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노력 없이는 새로운 지식이 창출될 수 없다”고 말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다음 주의 '신아크로폴리스' 지면 ▼
▽주제=나는 누구와 함께 사는가?
▽강사=윤혜린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주요내용=이 시대의 우정, 성, 사랑, 결혼
공개강좌는 안민포럼(www.thinknet.or.kr)으로 문의 바랍니다.
02-521-5160, 7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