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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만이 살길이다]투자 옥죄는 전투적 노사관계

입력 | 2004-01-11 17:34:00


임금인상과 아웃소싱에 대한 이견→파업→직장폐쇄→사업철수 검토→스위스 본사 원정투쟁→파업 145일 만의 타협.

지난해 가장 많은 우려를 자아냈던 한국네슬레의 노사분규 드라마다.

한때 입에 담기도 힘든 섬뜩한 구호들이 난무했다. 당시 네슬레 경영진은 ‘노조의 주장과 구호를 번역해서 보내라’는 네슬레 본사의 지시에 응하지 못하지 못할 정도였다. 스위스의 본사까지 찾아가 항의시위를 벌인 노조 대표자들은 ‘오죽했으면 여기까지 왔겠느냐’는 동정을 받기보다는 과격한 시위 방식으로 주목을 모았다.

회사측의 무리한 대응을 시사하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네슬레의 ‘다국적기업에 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이드라인’ 위반 건이다. 해당 조항(4장 7조)은 이렇다. ‘단체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협상에 영향을 주거나 단결권을 방해하기 위해 사업철수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 스위스 정부는 그해 12월 1일 네슬레측의 위규 건에 대해 조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조사 착수 3일 전인 11월 28일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다.

어쨌거나 노사 양측의 극심한 힘겨루기의 결과는 400억원의 매출 손실, 국내 커피시장 점유율 10%포인트 하락, 근로자 1인당 900만원의 임금손실 등이었다. 또한 한국네슬레의 기업이미지는 커피 메이커에다가 노사분규가 추가됐고, 한국은 또다시 ‘파업 강국’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투자 내쫓는 노사관계

‘과격한 노조 때문에 기업하기 힘들다’며 짐을 싸는 외국인기업도 늘고 있다. 노조도 인정한다. 지난해 9월 미국에서 열린 한미재계회의에 참석했던 한국노총 김성태 사무총장은 “한국 노사관계에 대한 미국 투자자들의 시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싸늘해 놀랐다”고 말했다.

그렇잖아도 국내의 많은 제조업체가 중국의 추격 등에 맞설 뾰족한 방법이 없어 ‘계속 기업할 자신이 없다’는 판. 여기에 노조가 핑계를 만들어주니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리는 꼴이다.

일부 대기업 노조는 더 큰 문제다.

포스코에서 신입사원은 ‘천연기념물’로 불린다. 외환위기 이후 4년간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 퇴출 대상 직원들이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 전직(轉職) 프로그램을 만들고 퇴직금을 더 준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윤석만 포스코 전무는 “신입사원이 제때 충원되지 않다보니 현장인력의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조직이 동맥경화에 걸린다”고 말했다.

정년이 57세인 현대중공업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43세. 20, 30대도 하기 힘든 용접 및 조립작업을 50대 직원이 하고 있다.

울산에 있는 현대자동차의 재하청업체 전진산업이 지난해 9월 폐업을 선언했다. “원청업체의 파업으로 인한 조업피해와 1988년 이후 계속된 납품가격 동결을 못 견디겠다”는 게 이유다. 자동차공업협회 관계자는 “원청회사나 1차 하청업체가 노사분규를 겪으면서 임금을 너무 많이 올린 뒤 그 부담을 2차 하청업체에 전가해 이들의 채산성이 악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죽했으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조직화된 노조의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문제라고 지적했을까.

○왜 극한투쟁만 하나

사용자가 있고 노동자가 있는 이상 단체협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했다 하면 타협과 양보가 없는 극한대립이다. 벼랑 끝 전술이 횡행한다. 춘투도 모자라 하투, 추투까지 이어진다. 새로운 교섭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너무 거칠고 비용이 지나치게 큰 것. 이 비용은 매년 지불된다. 이 같은 ‘고비용 노사관계’는 한국경제의 큰 약점이 돼 경영을 위협하고 투자를 옥죄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노동자도 극한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재취업 시장이 없다 보니 해고는 곧 사회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용자로서는 임금만 높고 생산성은 그저 그런 고연령 근로자를 내쫓고 싶어진다. 임금피크제가 안 되니 유혹이 더 크다. 시스템 자체가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추기고 있다.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분규가 하나 발생하면 사회 각 부문이 내버려두질 않는다. 상급 노동단체와 사용자단체가 개입하고 금방 대리전으로 번진다. 이해관계에 따라 편을 들고 싸움에 가담한다. 그래서 금방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해법은 뭔지’를 함께 고민하기 힘들어진다.”(조준모 숭실대 교수·경제학)

○대안은 없나

미국의 경우 2000∼2003년 침체기 동안 근로자의 18%가 해고를 당했다. 이렇게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이 해고가 엄격히 제한돼 있는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실업률은 절반 수준이다. 노동유연성으로 기업경쟁력이 커지면 고용이 오히려 확대되기 때문이다.(주우진 서울대 교수·경영학)

“노조는 3년 뒤 더 많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고용의 유연성’을 받아들이는 식의 용단을 내려야 한다.”(박덕제 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재취업 시장이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

“재취업 기회가 열려 있어야 극한투쟁을 피할 수 있다. 재취업 교육도 실효성 있게 이뤄져야 한다. 실업연금 등 사회적 보호장치도 탄탄히 갖춰져야 한다. 이런 전제조건 없는 고용유연성은 곧 해고의 자유만을 뜻한다.”(배규식 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고용과 재고용의 시장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며 이를 개선해야 저비용 타협이 가능하다는 것.

분명한 점은 떡을 키우지 않은 채 떡을 놓고 싸움질만 해서는 노사 모두가 공멸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픽 윤상선 기자

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이철용기자 lc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