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국회의원’이라는 잡지가 있다. ‘필승 총선전략’을 특집으로 내걸고, ‘비리 정치인들이 밝히는 재벌들에게서 돈 뜯어내는 법’이라든가 ‘5선 의원에게 듣는 국회에서 가장 놀기 좋은 곳’ 같은 풍성한 읽을거리를 담았다는 광고가 표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잡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은 실재하는 잡지가 아니다. 모니터 한 화면짜리 표지만 존재하는 사이버공간상 가상의 잡지다. 최근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를 업고 나타난 ‘월간 궁녀’라는 제호의 잡지도 비슷한 경우이다.
그러나 적절한 물리적 조건만 주어진다면 ‘월간 국회의원’ 같은 잡지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21세기 벽두 ‘패러디 문화’를 주도하며 숱한 아류들을 만들어냈던 ‘딴지일보’가 6년 전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때도 그 시작은 바로 이런 발상이었다. ‘딴지일보’는 지난 연말에도 어느 유명 영화제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토룡영화제’를 사이버공간에서 벌여 국내 영화들의 ‘악명 높은 장면’들을 시상함으로써 ‘패러디 본가’의 자존심을 과시했다.
또 얼마 전 ‘라이브이즈’(www.liveis.com)라는 사이트에서는 대선자금 수사를 둘러싼 정치권의 회오리를, 각종 무협영화들에서 차용한 배우들의 모습에 얼굴만 바꿔치기한 합성사진을 곁들여 ‘대선 자객’이라는 제목의 무협 극화로 재구성했다.
이것은 ‘미디어 바이러스’(황금가지)의 저자인 더글러스 러시코프(뉴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미디어를 즐기며 자라난 신세대 ‘미디어 활동가’들은 미디어를 만든 사람들보다 미디어를 더 잘 이해하고 조작하며 기존 미디어를 농락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미디어는 전통적으로 ‘권력’이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례들은 대중이 단지 미디어에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처럼 기성 미디어에 착 달라붙어 무력하게 만든 뒤 대안이 될 수 있으며 저항적인 세계관을 퍼뜨리기도 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을 ‘미디어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것.
특히 인터넷에서는 대형 언론사와 한 개인의 홈페이지는 적어도 형식상으론 아무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자본 투자규모가 다르므로 내용상으로는 비교하기 곤란하다. 하지만 오히려 거대조직이 흉내 내지 못할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얼마든지 차별성을 확보해 ‘손님’을 끌어 모으는 경쟁을 벌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표현의 자유’는 좀 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개념이 된다.
러시코프 교수가 창안한 ‘데이터스피어’ 또는 ‘미디어스페이스’는 정보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쓰레기 정보(junk information)’의 바다이기도 하다. 인터넷 또한 다른 모든 매체가 그러하듯이 정보의 유통경로이면서 동시에 ‘허위 정보’의 가장 효과적인 유통경로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몇 해 전의 ‘설악산 흔들바위 추락’설(미군들이 설악산 흔들바위를 밀어 떨어뜨렸다는 거짓뉴스가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유포)이나 지난해 불과 20분 사이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던 모 탤런트의 사망설 등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iamddonggae@hotmail.com
▼용어설명 ▼
○ 데이터스피어(datasphere) 또는 미디어스페이스(mediaspace)
PC, TV, 전화 등으로 촘촘히 서로 연결된 정보와 아이디어, 이미지를 하나의 통합된 순환시스템으로 보는 개념. 생태학자들이 지구의 모든 생명을 하나의 생물학적 유기체로 이해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정보공간이야말로 현대 인간의 상호작용이나 사회적 정치적 음모가 이뤄지는 공간이라고 본다. 인류 문명에서 고갈되지 않고 확장될 수 있는 유일한 미개척지로 일컬어진다.
○ 밈(meme)
정보복제와 의사전달이 가능한 집단에서 전파되거나 복제 확산되는 개별적 의미단위로 유전자(Gene)와 의미(Meaning)의 합성어. 사회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저서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처음 사용했다. 일단 발언되거나 공개된 문장, 동영상, 음악 등 모든 의미단위는 사용자에 의해 편집 재창조되면서 무한 복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