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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월 셋째주

입력 | 2004-01-11 18:03:00

1950년대 군대에서 한 교관이 병사들에게 한국지도 읽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6·25전쟁 직후 군은 국토방위는 물론 문맹퇴치와 국민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아들의 文盲 깨우쳐준 聯隊長께 보내온 어머니의 글월▼

휴전이 된 이후 일선에서는 문맹 사병에 대한 한글교육이 전개되고 있거니와 이 한글교육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선과 후방과의 사이에 맺어진 아름다운 이야기 한 토막.

즉 忠北 堤川郡 堤川邑 高明里에 거주한 육군 제五三七六부대 제二대대 제八중대 一등병 秦周植군의 어머니 尹씨는 일직이 그의 남편과 사별하고 周植군을 국민학교도 보내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오던 중 周植군이 명예의 입대를 하게 되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아들의 신상을 밤낮 염려해 왔었는데 지난 一월七일 周植군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서 그가 원하고 원했던 글을 배우고 이제는 제법 그의 의사를 글월로 표현하게 되었고 또 한글교육학교에서 二등상으로 ‘만년필’까지 탔다는 이야기를 듣자 어머니는 일선장교들의 정성에 감격한 나머지 끼니를 못 이어가는 가난한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호주머니를 털어 부대장 李世鎬 대령에게 ‘위스키’ 한 병과 감사의 서한을 보내 전 장병에게 크게 감명을 준 바 있었다 한다.

▼문맹사병들에 유격훈련 틈틈이 '한글훈련'▼

전쟁과 그 직후의 피폐했던 시절, 생존 자체가 문제였던 서민들에게 군대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글까지 가르쳐주는 곳이었다. 1950년 11월 육군 정훈대대가 한글 교육을 실시하고, 해병대는 53년 ‘한글독본’ 교육을 매주 12시간 이상 실시했다. 이런 식으로 군이 실시한 한글교육의 수료자는 50년부터 56년까지 48만여명에 이르렀다.

변변한 옷가지 하나 구하기 힘들던 때 멋진 제복에 귀한 만년필까지 들고 나타난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렇다고 당시 군대가 마냥 고마운 곳만은 아니었다. 매질과 얼차려가 다반사였고, 보급도 태부족이었다. 6·25 때는 수많은 군인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특권층과 부유층에 병역기피가 만연했던 것도 당시 군의 열악한 상황을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진주식 일병’의 미담은 오히려 예외적인 케이스일 수도 있다.

지금의 군은 그 시절과 많이 달라졌다. 구타가 금지됐고 병영 내에 컴퓨터실, 노래방까지 마련돼 있다. 54년 48개월이던 복무기간도 55년 36개월, 2003년 24개월 등으로 계속 줄었다.

하지만 최근 군에 가지 않기 위해 문신 시술을 받았다 적발된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젊은이들의 군 기피 의식은 여전하다. ‘특권층은 군에 안 가도 잘 나가기만 하더라’는 경험칙이 ‘군대는 가능하면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은 아닐까.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