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운데)가 상임중앙위원회의를 소집해 검찰 수사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했다. -김경제기자
현역 국회의원 6명이 각종 비리에 연루돼 10일 무더기로 구속된 데 이어 검찰이 부패 정치인을 향한 사정의 고삐를 더욱 죄고 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장을 지냈던 김영일(金榮馹) 의원을 구속하면서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속도를 높이고 있는 데다 서울지검 특수2부가 대우건설 비자금 수사에 본격 착수하는 등 정치권에 대한 검찰의 고강도 사정이 기세를 더하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권은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에 대한 검찰의 비리 수사가 어디까지 확대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초긴장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한나라당 홍사덕 원내총무(왼쪽)가 11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의 편파수사를 주장하며 이를 따지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 방침을 밝혔다. -김경제기자
법조계 주변에서는 검찰이 국회가 열리지 않는 시기 동안 ‘검찰권 행사에 의한 무혈 정치 혁명’ 국면을 마련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검찰이 과거 정부의 권력형 비리를 정통으로 수사하지 않거나 ‘피라미’들만 구속할 경우 총선 전 ‘야당 죽이기’ 또는 ‘편파 수사’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선자금 불법 모금 사건 수사=검찰이 김영일 의원을 구속한 것은 불법 대선자금의 사용처를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것이라는 방향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불법 대선자금을 선거에 사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유용한 일부 현역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이 형사 처벌될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은 이미 대선자금 수사 초기에 여야의 고위 정치인들이 개인적으로 유용한 정황 및 단서를 포착하고 광범위한 내사를 벌여 왔다. 검찰 수사팀 주변에서는 여야 현역 의원을 포함한 정치인 10여명이 수사망에 걸려들었다는 말도 돌았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김 의원과 이재현(李載賢·구속)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의 법률고문을 지낸 서정우(徐廷友·구속) 변호사 등을 상대로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의 개인 유용 여부를 조사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대선 자금 집행을 총괄한 김 의원과 자금 집행 실무를 맡은 이 전 재정국장 등이 사용처에 대해 함구하면 수사의 진전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검찰은 노무현(盧武鉉)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의 총무본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자금 모금 및 집행을 총괄한 이상수(李相洙) 열린우리당 의원을 불러 불법 대선자금 수수 여부 등을 조사할 계획이지만 난관이 예상되고 있다.
한나라당에 100억∼150억원대의 불법 자금을 제공한 삼성, LG,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들이 노 후보측과 관련해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들은 ‘여권에 제공한 불법 정치자금을 자백하면 정권으로부터 보복을 당해 현 정권 내내 기업이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입을 굳게 닫고 있다는 것.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검찰도 고민에 빠졌다. 한나라당의 경우 대기업에서만 500억원대의 불법 자금이 모금된 것으로 드러났지만 노 캠프는 밝혀진 게 거의 없기 때문. 한나라당이 형평성을 잃었다며 연일 검찰 수사를 비난하고 있는 것도 검찰에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노 캠프의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못할 경우 대선자금 수사 전체의 역사적 의미 및 성과가 상당 부분 퇴색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이 삼성그룹의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 등 5대 기업의 핵심 임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노 캠프의 불법 대선자금을 얼마나 밝혀낼지가 이번 수사의 최대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대우비자금 수사=검찰은 ‘가능한 한 빨리’ 관련 수사를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이미 상당한 정황과 단서를 확보했기 때문에 수사를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것. 실제 검찰은 7일 대우건설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대우건설 비자금 조성 및 정치권 살포를 입증할 수 있는 상당한 자료를 입수했고, 이를 토대로 한 관련자 조사에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검찰은 이번 주부터 대우건설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단서가 포착된 정치인들을 차례로 불러 조사한 뒤 혐의가 드러나면 형사처벌할 계획이다. 이달 21∼25일 설 연휴가 끼어 있고 다음달이면 다시 임시국회가 열리기 때문에, 현역 국회의원이 포함된 정치권 인사들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이 달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 진행 중이던 대우건설이 왜 정치권에 거액을 뿌렸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1999년 말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건설이 3년여 만에 각종 대형 공사들을 수주하면서 3조4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업계 2위로 급성장한 것이 정치권 로비와 연관됐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
이와 함께 3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어떻게 조성했는지도 검찰의 수사 대상이다. 자금 집행 과정을 일일이 채권단에 보고해야 하는 워크아웃 기업의 특성상 거액의 비자금을 손쉽게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내외부의 공모나 묵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검찰은 대우건설 비자금 조성 과정에서의 하도급 비리나 트럼프월드 건축 과정에 구여권 인사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발 빠르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기타=국회의원 6명의 무더기 구속은 대전지검 등 전국 검찰청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정치인 관련 비리 수사의 강도와 속도를 높이는 데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대전지검은 한화건설이 하청 업체 공사비를 과다 계상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계에 로비를 벌였는지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