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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이성형/동네마다 도서관을 만들자

입력 | 2004-01-13 18:06:00


어린 시절 시립도서관 주변에서 살았다. 공터에서 공을 차다가 싫증이 나면 서가에 꽂힌 어린이 잡지를 먼저 보려고 뛰어가곤 했다. 한참 책을 읽다 신발을 잃어 버려 어머니에게 혼난 적도 있었다. 중학교 때는 불행 중 다행으로 굴지의 의류회사와 담을 같이했다. 하천으로 흘러드는 염색 폐수를 보며 등교했지만 당시로선 꽤 좋은 도서관을 맘껏 이용했다. 그 회사가 학생들에게 도서관을 기증했던 것이다. 입시제도가 막 폐지된 시절이어서 싫증 날 정도로 공을 찼고 맘껏 책을 읽었다.

▼학원-PC방에 빼앗긴 아이들 ▼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는 도서관 개념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라졌다. 폐가식이어서 무슨 책이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좁은 열람실은 으레 입시를 준비하는 독서실로 변했다. 결국 교과서나 참고서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시절의 열람실도 교재를 읽거나 고시와 취업 준비 서적을 읽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난 지금도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열정적으로 책을 읽었던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시의적절하게 입시제도를 바꿔 준 고 박정희 대통령께 뒤늦게나마 감사드린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어떠한가. 학원은 교과 내용을 먼저 가르친다. 2∼3시간의 지겨운 학원공부가 끝나면 어두컴컴한 시간이다. 공을 차고 책을 읽을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 지 오래다.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중학생들도 있다. 야단을 쳐 보기도 하지만 대꾸조차 않는다. 더러는 PC방에 가서 손을 푼다. 귀가해서 저녁을 먹고 나면 졸린다. 다음날 학교 수업시간은 정말 시시하다. 이미 다 배운 것을 반복한다. 공부나 탐구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고 오로지 시험과 컴퓨터게임 점수에 목을 맨다. 옛날의 축구공과 독서는 이제 학원과 게임방으로 대체됐다. 아이들은 갈 곳을 잃어 버렸다.

주5일 근무제가 곧 정착된단다. 갈 곳이 없기는 어른도 마찬가지다. 이미 퇴직자나 실직자와 같이 갈 곳을 잃은 장년층도 많다. 여유가 있는 직장인들이야 골프 스키를 하거나 농가주택에 머물며 휴일을 보내겠지만 사실 95%의 국민은 갈 곳이 없다. 집안에 있자니 눈치 보이고 등산도 매일 하긴 지겹다. 동네마다 아늑하고 멋진 도서관이 하나씩 구비돼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립이나 구립도서관처럼 클 필요도 없다. 아늑한 카페 분위기의 공간에 아이들은 백과사전이나 참고도서를 보며 탐구학습 과제를 준비한다. 어른들은 아이와 대화를 하며 도움을 준다. 아니면 잡지나 책을 뒤적이며 소일을 한다. 미래의 사업 구상도, 구직 준비도 가능할 것이다. 간단한 카페테리아 시설도 있다면 정보 소통의 공간이 될 수도 있으리라. 동호인 모임, 독서와 영화감상 클럽, 연구 소모임이 조직된다면 동네 중심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리라.

1000개의 도서관을 짓자. 큰 돈이 들지도 않는다. 정부가 나서고 지방자치단체가 도와주고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그윽한 카페 분위기의 쾌적한 학습문화공간이 사람들을 끌게 되리라. 퇴직한 교직자와 경영인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미취업 상태의 사서들이 동원되고 학부모들이 손을 빌려준다면 저비용 고효율의 새로운 인프라가 탄생할 것이다.

▼작지만 독특한 문화공간으로 ▼

동네마다 아름다운 도서관을 경쟁적으로 만들자. 책 비디오 음반 전시물이 잘 구비된 작지만 독특한 문화와 지식 네트워크를 방방곡곡에 만들자. 1년마다 경연대회도 갖자. 동네 도서관은 지식기반경제와 총체적 학습사회의 기초 인프라로 자리를 잡게 되리라. 조만간 학원과 PC방에 빼앗겼던 아이들이 돌아올 것이다. 공교육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탐구와 학습 열풍도 되살아날 것이다. 직장인들도 연휴가 즐거울 것이고 기업은 생산성 향상이란 부대효과도 얻을 것이다. 출판 종수와 부수가 늘면서 작가들과 출판업계의 시름도 줄어들 것이다. 독서와 탐구 문화가 동네마다 살아난다면 2만달러 시대도 쉬 올 것이다.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