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알름 호수의 습지에서 바지만 걸친 로렌츠 박사가 메트리스에 누워 거위들에게 풀을 뜯어먹이고 있다. 그는 야샹 거위들이 자기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곁에 머물며 눈을 맞추는 상황에서 무한한 평화와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사진제공 한문화
◇야생 거위와 보낸 일년/콘라트 로렌츠 지음 유영미 옮김/232쪽 1만원 한문화
오스트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 박사(1903∼1989)는 ‘놓아기르기’를 강조했다. 살아있는 동물들을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관찰해야 자연에 대해 의미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쥐 원숭이 갈까마귀 등 고등동물들을 우리에 가두지 않고 집안에서 무제한의 자유 속에 놓아기르는 로렌츠 박사의 방법론은 적지 않은 대가를 요구했다. 박사의 부인은 위험한 동물들로부터 젖먹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집안에 큼직한 우리를 들여놓은 뒤 그 안에 아이를 가둬놓고 키웠다.
그래도 박사는 충분히 보상받았다. “도망갈 수 있는데도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동물들은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저서 ‘솔로몬 왕의 반지’ 중)
로렌츠 박사가 거둔 놀라운 연구 성과들도 놓아기른 동물들 덕택이다. 로렌츠 박사는 새끼 거위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보는 것을 엄마로 인식하고 애착을 갖는다는, 이른바 ‘각인(刻印)’ 메커니즘을 규명한 공로로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 로렌츠 박사는 연구팀을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알름 호숫가로 갔다. 거위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 부르고, 함께 새끼를 돌보고, 집 나간 ‘청년 거위’를 애타게 기다리며 야생 거위와 보낸 일년을 147장의 사진과 글에 생생히 담아냈다.
● 봄 여름, 사랑과 잉태의 계절
혼기가 꽉 찬 야생 거위들은 이른 봄부터 본격적인 짝짓기에 들어간다. 짝짓기에 성공하면 놀랍게도 ‘후희(後戱) 의식’을 치르는데 암수가 함께 목과 꼬리를 곧추세우고 날개를 든 채 특유의 소리를 지른다.
로렌츠 박사팀은 야생 수컷 거위들 간에도 후희 의식을 치르는 동성애가 있음을 발견했다. 수컷 거위로만 이뤄진 커플은 암수 커플보다 야생 거위 사회에서 지위가 높다. 수컷 거위가 암컷 거위보다 덩치가 크고 힘도 세기 때문이다.
미혼의 암컷 거위가 동성애 커플 사이에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수컷 거위 커플 가운데 하나가 암컷 거위와 짝짓기를 해도 ‘후희 의식’은 자신의 파트너인 수컷 거위와 치른다. 그들에게 사랑과 섹스는 별개다.
이 암컷 거위가 스스로 둥지를 틀고 알을 품어 부화에 성공하면 수컷 거위는 알에서 나온 새끼들을 제 자식으로 인정하고 보호해 준다. 두 마리의 수컷 거위와 한 마리의 암컷 거위가 부부사이인 트리오는 종종 발견되는 가족형태. 로렌츠 박사는 “힘센 아빠 거위가 둘 있는 가정이 하나 있는 가정보다 새끼 양육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야생 거위는 사람과 비슷한 가정생활을 영위한다. 사랑으로 결합한 야생 거위들은 새끼를 낳으면 별일이 없는 한 일생 동안 부부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지킨다.
● 가을과 겨울, 그리고 야생 거위의 교훈
알름 호숫가에는 달력이 필요 없다. 남자 키만한 엉겅퀴가 피어나면 가을이고 그해에 태어난 새끼 거위들이 완전히 날 수 있을 무렵이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산이 눈으로 덮이고 나뭇잎이 노랗게 변하고 거미줄에 이슬방울이 맺히면 겨울의 문턱에 온 것이다. 이즈음 야생 거위들은 엄청난 흥분상태에 빠져든다. 철새여서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것이다.
로렌츠 박사팀이 야생 거위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야생 거위의 생태가 인간의 가정생활과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로렌츠 박사는 야생 거위와의 일년 생활을 소개하면서 독자에게 생명체와 교감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고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은 아니다. 로렌츠 박사는 오히려 이솝과 라퐁텐의 우화를 싫어한다. 동물들을 ‘도덕’과 결부시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도덕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본능적인 성향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가족과 공동체에 미칠 결과를 예측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올바른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가 거위의 삶을 통해 배울 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잠은 어떻게 자야 하는지, 휴식은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이 책은 깊이 잠든 거위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독일어판은 1985년 발간.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