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에 역사전쟁이 한창이다. 일본은 근대사에서 이웃나라에 자행한 만행을 합리화하고 제국주의를 미화하려는 망언을 되풀이하고 있다. 함께 피해당사국이던 중국은 만주에 대한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대사에서 발해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거대 사업을 국가적으로 벌이고 있다.
갑신년 새해 첫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했다. 일본 전통 의상 차림으로 신사를 공식 참배하고 있는 그는 무언가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일련의 행동인지, 독도 우표를 발행하려는 우리나라를 향해 독도는 일본 땅이니 한국은 잘 대응하라며 포문을 열었다. 일본 근대사의 ‘죄와 벌’의 문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형임을 망각한 것 같다.
▼제국주의史觀기우는 日-中 ▼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당사국인 한국보다 더 강경한 항의로 일관해 온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 역사에 합병하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사회과학원이라는 중국의 국가기관이 추진 주체다. 그 책임자 중 한 사람은 ‘남북한은 오랫동안 중국에 복속되어 있었다’며 제국주의적 역사관을 보였다. 그는 나아가 80년대 우리나라의 재야 사학자들과 신군부가 주장한 극우적 역사관을 비학술적 연구행위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힘의 논리에 입각한 영토팽창주의가 제국주의라면 이를 방어하려는 민족주의 역시 힘의 논리에 의한 영토보존주의다. 양자 모두 투쟁의 논리이지 평화의 논리는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보듯 민족주의는 도가 지나치면 극우 파시즘으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주의 역사학이 왜곡된 형태로 재야 사학을 형성해 80년대 신군부시대에 맹활약을 했다. 남북한이 오랫동안 중국에 복속되어 있었다는 중국 학자의 논리는 전통시대 평화공존을 모색하던 유교적 외교관계를 제국주의적 잣대로 격하시키는 얘기다. 반제국주의를 주장해 온 중국 정권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자 자가당착이 된다. 일본의 근대 제국주의에 항의해 온 중국이 고대사에서의 역사제국주의는 괜찮다는 모순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역사전쟁에서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한심하다 못해 허탈감까지 안겨 주고 있다. 일본 총리의 경거망동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설득력 있는 반박을 못하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에 대해 문화관광부 장관은 ‘정부보다 민간 학술 차원의 협의와 토론 과정에서 바로잡아야 할 일’이라며 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발언을 했다. 중국이 많은 예산을 투입해 국가적으로 벌이는 총력전에 민간 학자들이 알아서 대응하라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하라는 말과 같다.
정부는 정치 현실에 매몰되어 국가의 미래가 달린 이 역사전쟁을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다루고 있지 않나 싶다. 역사학계에서 전공자들이 중심이 되어 문제 제기를 하고 중국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아직 고도의 논리나 전략으로 무장하지 못하고 일회성에 그치고 마는 듯하다.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국회, 학계 그리고 시민운동단체까지 아우르는 범국가적 협조 체제가 필요하다.
▼문화-평화사관으로 대응을 ▼
이 역사전쟁은 총칼 없이 필설로 하는 논리 싸움이며 결국 역사를 보는 눈의 문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나라들의 가공할 역사전쟁에 대비해 역사관을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생존 문제가 되었다.
그들과 똑같은 제국주의 역사관이나 전쟁사관으로는 대응 논리가 나올 수 없다. 오히려 문화사관과 평화사관에 입각해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 사관으로 우리의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에 공감대를 형성해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역사관을 논파하는 것만이 역사전쟁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