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큰 살림꾼이…
이한빈 박사를 추모하며
그에게는 늘 ‘한국의 첫 번째’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1949년 그는 광복 후 첫 국비유학생으로 하버드의 경영대학원에 유학해 한국의 첫 경영학석사(MBA)가 되었다. 그가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던 1951년의 한국은 6·25전쟁 와중이었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삶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한 곳에 귀국하려는 ‘젊은 MBA’의 결심은 하버드의 지도교수들을 놀라게 했다. 난국에 처한 고국에 귀국하겠다는 그의 조용한 위풍은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그의 은사들은 적고 있다.
임시수도에서 그는 25세 나이로 중앙정부의 예산과장이 됐다. 사환과 타이피스트를 빼고는 가장 어렸을 정도로 약관출사(弱冠出仕)한 그는 예산행정을 쇄신한 첫 근대관료이자 한국의 첫 테크노크라트였다. 1961년 35세에 재무부의 첫 사무차관이 될 때까지 수직 승진을 계속한 그를 두고 전후 복구기에 “이한빈 같은 관리가 다섯만 있어도 한국은 크게 달라지리라”는 말도 돌았다.
그는 6·25전쟁 과정에서 근대화된 집단으로 군부를 주목한 구안지사(具眼之士)로 자원해 국방대학원에 입학한 첫 고급 문민관료였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하자 협력을 거부한 그는 국외로 쫓겨났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바티칸, 유럽공동체(EC) 대사를 역임한 일견 화려한 외교 경력이었으나 그는 그것을 ‘알프스의 유배(流配)’로 여겼다.
4년 내내 사표 수리만 기다리는 사이 그는 ‘작은 나라가 사는 길-스위스의 경우’를 집필하고 장차 세계학계에서 주목을 끈 ‘발전형(發展型) 시관론(時觀論)’의 이론을 개발해 그의 제2생애를 풍요롭게 한 학문 및 대학활동의 텃밭을 닦았다.
그는 이제 ‘이한빈 박사’로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서울대, 숭실대, 아주대 등 대학 살림살이의 최고경영자로 봉사하면서 10여권의 책을 상재하는 학문 저술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한낱 기술관료가 아니라 시를 짓고 책을 쓰는 학자관료, 문사철(文史哲)에 밝은 현대의 사대부(士大夫)였다.
1979년 말 ‘서울의 봄’은 그에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다시 출사(出仕)할 기회를 주었으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또 꺾이고 말았다.
야에 있으면서도 그는 한국미래학회장, KAIST와 KIST 이사장, 자유지성300인회 공동대표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자서전 제목처럼 평생을 ‘일하며 생각하며’ 살아 온 그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天下有道則見 天下無道則隱) ‘나라의 사람(Statesman)’이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주님의 곁으로 돌아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최정호 객원대기자·한국미래학회 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