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계 이스라엘 국적의 핵무기 암거래상 아세르 카니는 지난해 말 미국에서 핵무기 기폭장치 10여개를 구입했다. 이 장치는 외국에 수출하려면 미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품목. 그러나 카니는 유령회사와 가짜 선적서류를 내세웠다. 그는 화물을 남아프리카로 보낸 뒤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를 거쳐 최종적으로 파키스탄에 전달하려고 했다. 곧바로 미국에서 파키스탄으로 보내면 미 정보당국에 적발될 것이 뻔했기 때문. 이 밀거래 경로는 카니가 덴버공항에서 체포되면서 밝혀졌다.》
파키스탄 일부 과학자들이 우라늄 농축방식의 핵무기 기술을 제3국에 제공한 경로가 조금씩 밝혀지고 리비아에 대한 사찰 결과가 공개되면서 세계적 규모의 ‘핵 암시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밀 부품공장까지=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결과 리비아는 핵무기 기술과 부품을 모두 해외에서 들여온 것으로 밝혀졌다.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술은 파키스탄에서, 부품은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 거래상으로부터 입수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부품 중 일부는 비밀 공장에서 제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전했다. IAEA는 비밀 공장이 말레이시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해 10월 원심분리기 부품이 말레이시아에서 독일 화물선으로 운반되다 압류된 적이 있기 때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한 나라에서 설계돼 제2, 제3국에서 만들고 제4국으로 실어 나른 뒤 최종 목적지로 전달된다”며 “전 세계에 사무실이 산재해 있는 핵 암시장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암시장의 구조=IAEA는 암시장이 민간과 정부의 이중구조로 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리비아와 이란의 우라늄 농축 기술은 파키스탄 핵무기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 박사 그룹에서 유출됐다고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사실상 인정했다.
또 원심분리기 부품 등은 중동 유럽 아시아 등 각지의 민간 거래상들이 조달하고 있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 과학국제문제연구소(ISIS) 소장은 “필요할 때마다 ‘실시간’ 기술자문도 지원된다”고 밝혔다.
칸 박사도 중동에 세운 유령회사를 통해 중간 거래상들로부터 미국 캐나다 유럽 등지에서 필요한 핵무기 부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타임은 전했다.
미국은 핵 암시장에 정부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주장을 믿지 않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칸 연구소가 파키스탄 군부 및 정보부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때문. 엘바라데이 사무총장도 “(핵 밀거래에는) 국가기관이 가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WMD 차단벽에 구멍=미국은 대량살상무기(WMD)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이라크를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처음부터 WMD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국제 핵 암시장이 이라크보다 시급히 대처해야 할 대상”이라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WMD 정책을 비판했다.
이 진기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