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증권 박정현(朴丁炫·32) 대리가 화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교수들이 극구 말렸다. 이공계 출신이 한 우물을 파지 않고 왜 경영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꽤 괜찮은 직업인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됐다. 그것도 입문 11개월 만인 올해 초 담당 분야(제지·출판·교육)의 베스트 애널리스트 4위에 올랐다.
“현대사회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원하는데도 한국의 이공계 대학들은 각자의 좁은 세계에만 매몰돼 있더군요.”
박 대리는 현재 이공계 위기의 상당부분이 이공계 내부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화학도→호텔매니저→애널리스트=박 대리의 경력은 다채롭다.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호텔경영학 석사와 MBA 학위를 땄다. 한때 호텔매니저도 했다.
진로를 놓고 방황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그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박 대리가 애널리스트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건 작년 9월 내놓은 한 편의 보고서 덕분이다. 그는 당시 한 출판업체에 대한 투자의견을 ‘중립’으로 평가했다.
신참으로선 다소 무모한 시도였다. 다른 보고서는 대부분 ‘강력 매수’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한 달 뒤 이 업체의 주가가 크게 밀렸다. 박 대리의 무모함은 제대로 된 ‘분석 결과’로 평가받았다. 비결은 ‘수학 실력’ 덕분이란다.
“유학 시절 인문계 출신보다 논리력과 분석능력이 낫다고 느꼈어요. 그 바탕에는 수학과 같은 이공계 기초가 깔려 있다고 봅니다. 기업 분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리적 이해가 필요한 금융 분야는 이공계 출신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무대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교육이 갑갑했다”=박 대리의 설명처럼 그가 금융업에서 인정받은 건 이공계 출신이 갖고 있는 역량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공계를 떠난 건 정작 대학의 이공계 교육 때문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화학을 좋아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 후 흥미를 잃었다.
“화학과를 나온 사람 모두 박사나 교수가 되려는 게 아닌데도 대학교육은 한 가지 틀만 강요합니다. 당장 취업이 걱정되더군요. 연구도 중요하지만 산업 현장에서 실제 쓰일 수 있는 기술도 필요하고, 다른 학문과의 연계도 고려해야 합니다.”
기업은 다양한 인재를 원하는데 이공계 교육은 교단의 논리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대리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지난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이공계 대학 졸업생 40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전공 만족도에서 이학 28.8%, 공학 분야는 32.4%로 인문학(52.3%)이나 의·약학(59.1%)에 크게 뒤졌다.
‘이공계 기피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는 ‘교육의 현장성 강화’라는 대답이 ‘장학금 확대’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공계 출신, 길은 많다=박 대리는 이공계 위기의 대책으로 이종(異種) 학문간 화학적 융합을 권한다. 제조업이나 금융업이나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이공계와 인문계 지식을 두루 갖춘 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전산이나 수학을 공부한 뒤 MBA 과정을 이수하는 것을 최고의 조합으로 평가합니다. 인문계와 이공계 영역을 넘나드는 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돼요.”
이공계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생물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등 학문간 벽을 허물어야 새로운 성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일부 대학과 정부에서도 인식하고 있다. 서울대 물리학부는 최근 학생들에게 ‘논술’ 공부를 시키고 있다. 과학기술부는 올해부터 여러 학과가 함께 참여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더 많은 지원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증권가에서도 이공계 출신 애널리스트가 늘고 있다. 삼성증권은 애널리스트 46명 중 7명이 이공계 출신이다. 현대증권은 41명 중 7명, 굿모닝신한증권은 40명 중 7명이 이공계 전공자다. 대학에서 전자, 화학, 기계 등을 전공한 사람들이 그 분야 전문 애널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박 대리는 “이공계 전공자가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생각보다 많다”며 “대학교육이 달라지고 이공계 전공자가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면 이공계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숫자에 강한' 이공계 금융계서 두각▼
돈을 다루는 금융기관은 전통적으로 상경계열 출신 인력이 많다. 그러나 최근 이공계의 활동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전자금융거래가 일반화되면서 수리(數理)에 밝은 이공계 출신의 역할이 늘고 있는 것.
금융계에서 이공계 출신 인력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야로는 단연 전산분야가 꼽힌다.
금융기관의 전산시스템은 모든 거래 정보가 집중되는 중추신경망으로 불린다. 이런 전산시스템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전산본부에는 전산, 전자공학 등 이공계 출신들이 핵심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최대은행인 국민은행의 전산정보본부에는 정보기술(IT)기획, IT시스템팀, 수신개발팀, 여신개발팀 등 7개 팀에 490여명의 정규직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공계 출신.
단국대 전자공학과를 나온 강윤식 국민은행 IT기획팀장은 “은행의 전산본부는 전산시스템 개발뿐 아니라 은행 경영을 위해 필요한 각종 정보를 분석하고 제공하는 핵심 부서”라며 “전자금융거래가 발달할수록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은행 내 이공계 출신은 전산뿐 아니라 리스크관리, 대출심사 등 여러 분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서강대 물리학과 72학번인 이연복 우리은행 개인영업전략팀장은 “정보통신,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 첨단기술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어 이들 분야에 대한 이해가 밝은 이공계 출신의 역할도 커질 것”이라며 “하지만 이공계 출신들은 전공 이외에 외국어, 경영 등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금융기관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증권사에서도 영업, 상품개발, 기업분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공계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증권업계의 이공계 출신 임직원 수는 작년 6월 말 현재 3395명으로 전체 임직원(3만3128명)의 10.2%에 이른다.
증권업계 이공계 출신 임원과 직원은 2001년 각각 20명(5.7%), 3142명(8.9%)에서 작년에는 20명(7.7%), 3375명(10.3%)으로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보험업계의 이공계 출신 인력도 의외로 많다.
삼성생명은 3200여명의 대졸 이상 임직원 가운데 370여명이 이공계 출신이다.
보험사 업무 중에서도 계리인은 수학과 출신 등 이공계가 거의 독차지하고 있다. 계리인은 상품별 보험금 지급 규모를 추산하고 보험료 수준을 결정하며, 적절한 책임준비금 적립 규모를 산출하는 보험사 내 핵심 요직이다.
고려대 수학과 80학번으로 2년 전 임원이 된 박영규 교보생명 경영관리실장(상무) 등 임원직에 오른 보험사 계리인들이 많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신연수 경제부 차장급 기자
▽경제부=이은우 김태한 고기정 박 용 기자
▽사회부=전지원 기자
▽동아사이언스=김훈기 이충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