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광장/고승철칼럼]갈수록 우물안 개구리

입력 | 2004-01-27 19:09:00


“국제사회에서 점점 더 ‘곰바우’가 돼 가고 있는 조국을 생각하면 가슴이 절로 답답해져 옵니다. 한국은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방향타를 잃은 듯합니다. 그래도 여기저기 깨어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 애써 자위합니다.”

국제문제 전문가인 어느 지인이 e메일로 보내 온 새해 인사 글이다. 곰바우라면 세상 흐름에 둔감한 미련퉁이를 지칭하는 속어 아닌가. 박사 석사 고학력자들이 수두룩하며 일부 환경미화원까지 학사들인 세계 경제 12위 국가 한국이 설마하니 곰바우랴. 이렇게 위안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국제감각을 보니 그런 위안이 착각이란 생각이 든다.

▼다보스회의 또 기회 놓쳐 ▼

21∼25일 열린 다보스회의를 보자. 스위스의 휴양도시 다보스에서 매년 1월 말에 열리는 이 회의에 당초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이 가기로 돼 있었다. 그가 갑자기 경질되는 바람에 한국 외무장관은 불참한 것. 2001년에도 당시 진념 경제부총리가 참석 일정을 돌연 취소한 적이 있다.

물론 이번 회의는 별 현안이 없어 참석 취소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 모임의 영양가가 점차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장삿속으로 운영된다는 비판도 들린다. 스위스 민간단체가 주도하는 비공식포럼이므로 정부 고위 인사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구속성도 없다. 하지만 이 회의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겠다. 올해에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등 정치 경제 지도자 2200여명이 참석한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회의는 참가국을 홍보하는 좋은 무대가 되기도 한다. 한국대표가 멋진 기조연설을 하고 각국 대표들과 매끄럽게 토론을 벌인다면 한국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국가신용도가 1, 2등급 올라갈 수 있는 셈. 잘 깔아놓은 이런 멍석자리를 한국정부는 스스로 걷어찼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제대로 알리고 신용도를 높이는 것이 한국의 흥망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각주구검(刻舟求劍)형 정부’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큰 무대를 도외시하고 총선 대비 등 국내 문제에 매몰돼서야 한국에 장밋빛 미래가 있겠는가. 열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을 오히려 국가발전의 지렛대로 삼으려면 먼저 세계 조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함을 모르는가. 수출이 잘 돼야 한국경제가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칠레 상원이 22일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제 한국이 화답해야 할 차례다. 이미 두 번이나 비준을 미룬 한국 국회가 또다시 비준을 무산시키면 한국의 대외신인도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것이다. 올해엔 쌀 시장 개방협상이 10년 만에 재개된다. 걱정스러운 것은 정부가 소승적(小乘的) 국수주의자들의 요구를 제어하지 못해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올해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도 진행될 것이고 미국 대통령 선거에 따른 국제관계에서도 많은 변수가 있다. 국가간 헤게모니가 재편되는 변환의 시점을 맞고 있는 것이다.

▼외면당하는 세계사 교육 ▼

한국은 세계의 흐름을 잘 읽어 진정한 국익을 찾아야 한다. 큰 것을 얻으려면 때로는 작은 것은 내줘야 한다. 이런 대승적 국가 전략을 세우려면 정권 지도부가 날카로운 국제감각을 가져야 한다. 안방 이불 위 씨름판에서 천하장사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또 한 가지 유쾌하지 않은 사실이 눈에 띈다. 2005학년도 대입 수능에서 세계사 과목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고교 2년생을 대상으로 한 예비평가에서 사회탐구 선택과목 중 세계사를 고른 학생은 12.7%에 불과했다. 과거엔 세계사는 당연히 배워야 하는 과목이었다. 이젠 선택이 되다 보니 학생들이 외면하고 있다. 세계사 교육을 이렇게 소홀히 하는 나라가 있을까. 한국은 갈수록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게 아닌가.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