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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영균/세계는 지금 '일자리 전쟁' 중인데

입력 | 2004-01-28 18:27:00


혹한의 설연휴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대학 휴학생이 먹을 것을 훔치다 붙잡혔다. 실업자에게 매달 수당이 지급되는 ‘복지국가’에서 젊은이가 배고픔을 못 견뎌 도둑질을 하다니 청년실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경제살리기’ 시국선언에 나섰던 교수들도 취직 못한 제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도 연두 회견에서 경제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다. 대기업회장들을 만나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장관들도 저마다 일자리 만들기 아이디어를 내놓기에 바쁘다.

실업대책 아이디어 중에는 파격적인 내용이 많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의욕이 넘친다. 공공부문에서 8만명을 추가로 고용하겠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업이 1명을 채용할 때마다 100만원의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대책까지 나왔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실업자 구제가 아무리 최대 목표라고 하더라도 걱정이 앞선다. 자칫 일자리도 만들지 못하고 경제만 거덜 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례도 있다. 대공황 이후 193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실업사태의 와중에 정권을 잡은 독일 나치스 아돌프 히틀러의 정책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하다.

실업사태의 해결을 공약했던 히틀러 정권은 먼저 실업을 억제하는 법을 제정하고 직접 실업자를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고속도로 건설 등 대규모 건설사업과 군수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만들고 유급 당원 공무원 등 공공분야의 일자리를 파격적으로 늘렸다. 그 결과 집권 전에 1000만명이 넘었던 실업자가 불과 수년 만에 400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실업자를 줄이는 데는 대성공이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빚에 눌린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나라까지 망하게 만들었다. 민주국가에서는 엄두도 못 낼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세금으로 고용을 늘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이고 장기처방이 못 된다.

일자리를 만드는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다. 기업하기 쉬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일자리를 만드는 첩경이다. 정부가 세금으로 실업자를 고용하는 것을 ‘일자리 창출’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을 늘리는 것이 최선의 실업대책이다. 이달 중순 삼성이 영국에 있는 전자레인지 공장을 철수하기로 결정하자 안타까움을 드러낸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삼성공장에서의 일자리 상실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영국의 노동력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숙련도를 더욱 향상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온통 총선에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 세계 각국은 치열한 ‘일자리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의회가 최근 정보기술 프로젝트를 해외에 발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한 것도 다른 나라에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작년에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 가서 만든 일자리가 100만개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붙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일자리의 소중함을 잘 몰랐던 것일까. 세금으로 일자리를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진짜 일자리’를 내쫓지 않는 것이 실업대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박영균 경제부장 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