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생을 위한 김용옥 선생의 철학 강의/김용옥 지음 /332쪽 7500원 통나무
학생들에게 연간 독서 프로그램을 추천할 때, 인문사상과 과학 분야는 흔히 방학 기간에 집어넣곤 한다. 평소 엄두를 못 냈던 긴 호흡의 글이나 깊이 있는 책을 시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철학책인 ‘중고생을 위한 김용옥 선생의 철학 강의’를 권해보려고 한다.
청소년 도서를 고를 때는 내용뿐 아니라 편집과 활자 크기, 제본과 표지 등도 고려해야함은 상식에 속한다. 인쇄 연도도 중요하다. 청소년용 책에는 이해를 돕는다는 이유로 시사적인 예가 많이 나오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이 책은 이런 도서 선정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다. 서점에서 이 책을 접한 사람이라면 재고도서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표지 속의 도올 김용옥은 20년 전 모습인 데다 편집이나 표현도 초판 당시와 거의 똑같다. 거기에다 이제는 찾아보기도 힘든 활판 인쇄는 조악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절판되지 않았고 필자가 고등학생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지금 학생들도 읽고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딘 입문서는 고전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다. 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나 러셀의 ‘서양 철학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이 책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그 정도 반열에 오른 책이라 할 만하다.
사실 중고생에게 권할 만한 철학 입문서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외양상으로는 구차스럽기까지 한 이 책이 왜 여전히 사랑받고 있을까? 물론 김용옥이라는 ‘인기 철학자’가 저자라는 점이 큰 몫을 하는 듯싶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내용에 있다. 도올의 글은 결코 가볍지 않다. 300여 쪽 남짓의 책 속에서 그는 형이상학, 논리학, 인식론, 윤리학이라는 철학의 네 가지 큰 틀을 빠짐없이 건드리고 있다. 머리가 복잡해야 정상인데도 독자들은 별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그의 입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희한한 일이다.
도올의 여느 책들이 그렇듯, 이 책도 주제와 거리가 먼 듯한 긴 서문과 수많은 딴소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도올의 ‘잡소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철학이다. 일상에서 동서양의 문화와 역사, 지성을 넘나들면서 철학은 어느덧 일상에서 천상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거듭난다. 책 끝머리에 있는 “나는 철학을 세속화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속을 철학화할 뿐입니다”라는 도올의 말은 이 책이 지닌 미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좋은 책은 오래 살아남으며 그 울림도 길다. 방학 동안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철학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학교도서관 총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