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의료보험 제도가 도입된 이래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의료보험은 아직 안정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의료보험이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의료계와 보험공단간에는 청구 품목 및 액수를 놓고 갈등의 골이 계속 깊어져 왔다. 그런데 최근 건강보험관리공단은 병·의원에서 작성해 청구하는 진료비가 허위 또는 과다 청구됐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환자에게 진료 명세를 보내 확인토록 하고, 환자가 과다 또는 허위 청구 사실을 가려내 신고할 경우 일정 금액을 포상금으로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교통법규 위반 사례를 신고하면 보상금을 주는 제도를 시행한 결과 이른바 ‘차(車)파라치’가 생겨났던 것과 같이 ‘의(醫)파라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텔레비전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던 1960년대에 일부 TV방송사가 범죄자를 찾아나서는 실황 프로그램을 방영해 폭발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이를 통해 실제 많은 범죄자를 검거하기도 했으나, 모든 시청자를 감시 대상으로 삼고 ‘형사 노릇’을 암암리에 조장하는 반윤리적 프로그램이라는 비판론이 대두되는 바람에 이 프로그램은 얼마 못가 중단됐다. 국내에서도 ‘차파라치’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돼 오래 지속하지 못했던 전례가 있다.
병원에 입원하지도 않은 환자를 입원시킨 것처럼 허위로 서류를 작성해 보험료를 청구한 예가 있다고 한다. 필자도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환자 진료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대부분의 의사들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하고 ‘의파라치’까지 거론하게 만든 대한의사협회를 나무랄 수밖에 없다.
의료계는 자체적으로 허위 청구로 문제를 일으킨 병·의원을 가혹하게 징계해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미리 조치했어야 했다. 대한의사협회가 오래전부터 자정(自淨) 노력을 기울여 왔다면 우리 의료계가 오늘날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비양심적인 일부 병·의원에 대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가혹한 처벌을 한다고 해도 의료계로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에 손상을 주는 것만은 삼가야 한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않으면 의료행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신뢰를 파괴하는 어떠한 행정조치도 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의사와 환자, 병원과 국민 사이에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않고 그에 반하는 행정조치를 내리겠다고 하는 것은 의료의 본질조차 모르는 소치다. 의료행정의 칼자루를 쥔 정부가 그릇된 소신을 밀어붙인다면 의료계 전체가 황폐화되는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정부는 의료비를 허위 또는 과다 청구하는 의사에 대해 기존의 벌칙을 10배, 100배 강화했으면 했지 환자들로 하여금 의사를 의심하게 하고 ‘의파라치’가 되도록 앞장서서 종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의료행위에서 발생하는 불법 탈법에 대해 가짜 양주 제조업자를 고발하면 포상금을 주는 것과 같은 규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성낙 아주대 의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