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 러셀.
광란의 19세기 말과 극단(極端)의 20세기를 살았던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데 한시도 게으르지 않았던 지성이었다. “거짓과 더불어 제 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겠다.”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憐憫)’은 그의 긴 생애를 이끌었다.
반전 반핵운동의 중심에 섰던 그는 1965년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이렇게 비꼬았다. “서구의 전쟁광들이 즐겨 쓰는 단어인 ‘자유’는 특이한 의미입니다. 그것은 전쟁광들의 자유인 동시에, 그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감옥을 뜻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은 수(數)의 절대성을 찾았던 러셀.
그는 11세 때 이미 종교에 대해 회의했다. 수학의 확실성을 접하고 기뻐했으나 기하학의 공리(公理)가 증명할 수는 없고 다만 믿어야만 한다는 데 좌절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확실성이나 불확실성을 가지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러셀은 다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그는 스승인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원리’를 썼고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집필을 이끌었다. 대중적인 에세이스트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나는 머리가 가장 잘 움직일 때 수학을 했고, 조금 나빠지면서 철학을, 그리고 더 나빠져서는 역사와 사회분야에 손을 댔다. 그리고 아주 나빠지기 전에 교육문제에도 눈을 돌렸다.”
러셀은 무정부주의자였다. 불가지론자였다. 회의론적 무신론자였다. 좌파였으나 소비에트 체제를 혐오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 공산주의 등 세계의 모든 ‘종교’는 진실이 아닐뿐더러 인류에 해로운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성(性) 개방론자였다.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
서구의 현대사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個人)이었다.
“우리들은 각자의 내면에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예술가를 한 명씩 가두어 놓고 있다. 부디 그 예술가가 환희와 행복의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그를 기꺼이 석방하기를!”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