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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희망이다]⑦과학자에게 장애는 없다

입력 | 2004-02-02 18:01:00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민 것은 엄지손톱만 한 얇은 종이였다. 타다 남은 재 부스러기처럼 보였다. 연구 성과물치고는 너무 소박했다.

“탄소나노튜브로 만든 종이입니다. 한국에서는 처음입니다.”

부산대 물리학과 김복기(金福基·33) 교수. 지난해 나노기술을 이용해 세계에서 가장 질긴 섬유를 개발해 주목을 끌었다. 관련 논문이 영국 ‘네이처’지에 실렸다. 지방대 연구진의 쾌거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이공계 지방대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불안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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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위기의 확인

실험실에 먼저 들렀다.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방학이라 당연하다 싶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사정이 달랐다.

“물리학과 교수가 31명입니다. 그런데 올해 대학원에 지원한 학생이 11명입니다. 작년에도 25명에 그쳤어요.”

제대로 된 실험을 하려면 교수 한 명에 석사지도학생(대학원생) 두 명은 있어야 한단다. 하지만 교수를 도와 줄 학생이 없어 실험이 중단된 게 지방대의 현실이었다.

“부산에 있는 모 대학원의 물리학과 석사과정에는 올해 단 4명이 지원했답니다. 그나마 부산대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요.”

지방대에는 이공계 문제의 모든 현안들이 결집돼 있다. 하지만 부산대 김복기 교수는 희망을 얘기한다. 아직까지는 연구 역량이 남아 있고 실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곳도 많단다.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몫이다.

인력만 충원되면 예전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김 교수는 그건 필요조건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정부 연구용역 제안서를 쓴 기간만 6개월이나 됩니다. 10개를 제출해 3건만 성공했습니다. 그것도 1년짜리 단기 연구입니다.”

연구 용역을 못 따면 실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재(再)임용 때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현행 교수 평가 시스템을 설명한 것이다.

김 교수도 교수를 ‘성과’로 평가하는 데 이론(異論)이 없다. 하지만 모든 교수들이 단기 용역에 매달리는 성과주의와, 이에 따라 많은 시간이 걸리는 기초 연구는 엄두도 못 내는 현실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6월에 용역을 따면 자금 집행은 9월에나 가능합니다. 첫 3개월 동안은 자금 지원 없이 연구를 하거나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셈입니다.”

그는 “연구 용역 대부분은 시작은 늦어도 마감은 지킨다”는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강의실-존립기반의 붕괴

강의실로 자리를 옮긴 그가 털어놓는 학부의 모습은 대학원보다 심각했다.

“물리화학부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커트라인이 간호학과보다 낮습니다. 취업 가능성이 점수를 좌우합니다.”

의대나 한의대 때문에 이공계 지원생이 줄어든다는 것은 지방대로선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의치한(의대 치대 한의대)이 아닌 다른 학과로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해 이 학교 물리화학부 신입생은 110명. 1년 뒤 학과를 정하고 보니 66명이 화학과를, 나머지는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화학과 졸업생은 그나마 국내 화학산업 덕분에 취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물리학과는 외국으로 나가지 않는 한 어렵지요.”

여기에 매년 신입생 20%가 등록금만 내고 휴학을 하는 현실도 그가 부닥쳐야 하는 장벽이다.

#연구실-그래도 희망은…

탄소나노튜브 종이를 건네받았던 연구실로 돌아갔다. 이 종이는 김 교수가 대학원생 한 명과 함께 물리학과 실험실에서 만들었다. 직경 10억분의 1m 크기의 관을 종이로 만든 것이다. 휴대전화나 노트북컴퓨터의 전지에 적용할 수 있다. 상용화가 되면 전지 성능을 8∼10배가량 높일 수 있는 획기적인 개발이다. 포항공대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앞서는 기술력이다.

“미국 대학의 연구소 등지에서 견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많습니다. 국내에서도 관심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탄소나노튜브와 관련한 기술력은 삼성전자와 함께 김 교수팀이 세계적으로도 선두에 있다. 그는 미국에서 탄소나노튜브를 꼬아 섬유를 만든 바 있다. 인간의 근육보다 강도가 100배나 강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수소자동차의 배터리에도 응용할 수 있다.

“지방대도 각각의 강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수 인재들이 아직은 교단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교수 평가 시스템과 인력 문제가 계속된다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는 지난해 연구용역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지방대이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보이지 않는 차별을 설명했다. 비슷한 제안서라도 이왕이면 수도권 대학이 낙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물리학과 같은 기초 학문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공학에만 집착하는 현실도 넘어야 할 장벽이다.

김 교수는 몇 년 전 해외 과학 관련 잡지에 실렸던 표지 그림을 예로 들었다. 지구와 달을 탄소나노튜브로 만든 케이블로 연결해 엘리베이터를 매달아놓은 것이다.

“그런 상상력이 과학 기술을 현실로 만듭니다. 하지만 그 상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방대 연구진 세계적 성과 잇달아▼

지방대 연구진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성과를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전남대 농업식물스트레스 연구센터의 김정묵 교수(44)는 저온에서 잘 견디게 하고 꽃 피는 시기를 조절하는 유전자를 애기장대라는 식물에서 세계 최초로 발굴해 저명한 학술지 ‘네이처 제너틱스’ 1월 25일자에 발표했다. 만일 저온 저항성 유전자를 벼 오이 호박 등 주요 농작물에 주입해 키우면 농업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경상대 응용생명과학부는 몇 년째 세계적인 업적을 쏟아내 화제다.

2002년과 지난해 김민철 박사(35)와 허원도 박사(36)가 ‘네이처’와 ‘셀’에 논문을 게재했다. 또 윤대진 교수(40)는 가뭄 냉해 고온 등 다양한 스트레스에 견딜 수 있는 유전자조작 식물을 만드는 데 성공해 ‘미국 과학원 회보’ 1월 7일자에 게재했다.

경남대 화학과를 졸업한 토종박사 박현국씨(31)는 지난해 일본 이공계의 명문 도호쿠(東北)대에 응용화학부 조교수로 채용됐다. 원자력폐기물 등 각종 독성 환경물질을 현장에서 분석할 수 있는 휴대용 기기를 개발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경상대 조무제 총장은 “개인이든 팀이든 잘 하는 분야를 특성화시켜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예로 1946년 국립 진주농과대학에서 출발해 1980년 종합대로 승격한 경상대는 수십년간 쌓아온 작물 연구가 전략 분야였다. 그 노하우를 인정받아 1990년 과학기술부로부터 우수연구센터(SRC)로 지정돼 매년 10억원에 가까운 연구비를 9년간 지원받았다. 또 교육인적자원부가 시행하는 BK21사업에 지방대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하지만 난관이 만만치 않았다. 조 총장은 “정부가 지방대는 무조건 안 된다는 선입관이 너무 강해 설득하느라 애먹었다”고 말했다. 가장 큰 편견은 우수 인력이 없다는 인식.

전북대 지구환경과 조봉곤 교수는 “1990년대부터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우수 인력이 지방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연구를 수행할 대학원생이 부족해 교수들의 논문 편수가 적다. 그래서 마치 지방대에는 우수한 학자가 없다고 인식된다는 것. 조 교수는 “마라톤경기에서 10km 뒤처져 출발하는 선수에게 왜 졌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표현했다.

정부는 지방대 이공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방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학을 중심으로 기업, 연구소가 연계해 기술 혁신을 이루자는 것이 핵심.

하지만 조 총장은 “지방의 산업기반은 굴뚝형인 경우가 많다”며 “첨단 과학기술이 있는 지방대의 경우 국제경쟁력이 없는 중소기업과 당장 어떻게 연계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신연수 경제부 차장급 기자

▽경제부=이은우 김태한 고기정 박 용 기자

▽사회부=전지원 기자

▽동아사이언스=김훈기 이충환 기자

※과학기술과 이공계 문제에 대한 제보와 의견을 기다립니다.

전화 02-2020-0823 e메일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