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후 10시경 서울대 관악캠퍼스. 방학 중 토요일인 탓인지 학교는 인적마저 끊겨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고 모두 잠든 것은 아니다.
캠퍼스 가장 깊숙한 곳에서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공대가 있는 301동과 302동. 흰눈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물 주위로 밤참을 실은 중국집과 피자 전문점 오토바이가 드나들었다. 아직도 적지 않은 학생들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302동 응용화학부의 촉매 및 표면화학연구실. 입구부터 시큼한 약품 냄새가 풍겼다. 실험 기계가 ‘벅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는 실험실 한구석에서 한 석사과정 학생이 노트북PC에 무언가를 열심히 입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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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건 선배건 실험을 할 때는 집에 못가는 일이 많다. 힘들지만 고민과 토론 끝에 원하는 실험 결과가 나왔을 때는 피로가 싹 사라진다.”
7시간째 실험에 매달리고 있다는 그의 말 속에서 이공계의 꿈과 희망이 배어 나왔다.
▽밤을 잊은 공대의 공부벌레들=금요일인 지난달 30일 오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날 오후 11시경 302동 6층의 유변공정연구실.
컴퓨터로 다음날 할 실험 프로그램을 짜고 있던 이성식씨(29·박사과정 2년차)는 “발소리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민감한 실험을 하거나 화학반응이 일어날 때까지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때는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의 컴퓨터 옆에도 어김없이 ‘라꾸라꾸’라고 불리는 간이침대가 눈에 띄었다. 밤을 새우며 연구를 하는 공대생에게 필수품이라는 게 그의 설명. 실험실을 비울 수 없어 화학약품을 끼고 식사를 하는 풍경도 공대에서는 흔하다.
이 실험실의 ‘방장’인 박사 1년차 정창곤씨(27)는 “오후 6시쯤 퇴근을 하는 거리의 직장인들을 볼 때 가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도 아마 학생 때는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 오더라도 이 건물에는 항상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밤이 돼도 무섭지 않다는 게 이들의 얘기. 학교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가 끊기는 오후 11시반에도 초저녁이나 다름없이 학생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누가 이들의 꿈을 꺾는가=밤늦도록 연구에 매달리는 이들에게도 위기감은 있었다.
지난달 29일 밤 서울대 관악캠퍼스 302동 물환경막분리연구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학원생들이 오후부터 시작된 실험 결과치를 기록하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강병기기자
“예전에 ‘군사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던 박사 병역특례 시험이 요즘은 지원자가 없어 원서만 내면 합격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전기공학부 박사 4년차 전병철씨(29)는 공학을 공부하려는 석박사 과정 후배들이 줄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김휘씨(26·전기공학부 박사 2년차)는 “10∼11년간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려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기업에 취직을 해도 연봉은 4500만원 수준”이라며 “의대 등과 비교할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신(新)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공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장학금 조금 더 준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박사과정 학생)
302동 유기합성실험실에서 만난 박사과정 7년차 변장웅씨(31)는 “같은 학번 동기생 55명 중 절반 정도가 유학을 갔거나 준비 중이다”며 “국내에 비전이 없으니 외국으로 나가는 것 아니냐”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희망을 이야기하자=‘이 공학관은 기술입국을 염원하는 국민의 열망을 담아 정부와 산업체의 후원으로 건립됐습니다.’
공대 301동 로비에 걸린 안내문이다. 공대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크다는 뜻. 그래서일까. 학교에서 공부에 매달리는 동안에는 이공계 위기가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게 공대생들의 한결같은 말.
“게네들(빛)이 예상했던 대로 움직일 때 짜릿한 희열을 느껴요. 반도체 등에 비하면 선진국과 기술 격차가 크지만 세계 최고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그만큼 많은 셈이죠.”
광(光) 공학을 연구하는 박사과정 3년차 한승훈씨(28). 과학고를 졸업하고 공부가 좋아 공대에 진학했다는 그는 ‘전등을 보면 빛이 느껴진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부터 꺼냈다.
한씨는 얼마 전 파장 대역이 넓은 새로운 필터 모델에 대한 논문을 써서 미국 광학회의 학술지에 실리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과학자는 세계를 이끌고, 의사는 세계를 유지한다’는 말을 듣고 공대를 택했다”며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응용화학부 석사 2년차 김난주씨(23·여)는 “선배들에 비하면 연구 여건이나 장학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며 “여학생 이공계 인력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공학부 석사 1년차 박수영씨(27)는 ‘이공계 위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가슴에 새긴다.
“현재는 과거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현재의 일로 자신의 미래를 결부시키지 말자.”
박용기자 parky@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서울대 공대생들의 말말말▼
▽‘공대에 왜 갔느냐’고 묻는 것은 우리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이공계 위기를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오히려 사기를 꺾는다며.
▽친구들하고 ‘박사가든’이라는 고깃집을 차리기로 했다=공학 박사를 따고도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정말 우리가 좌절할 때는 연구가 안 풀릴 때다=학교 밖에서 이공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학교 안에서는 연구가 최우선이라며.
▽‘부품’ 끌어 모으기는 그만=이공계 학생을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부품처럼 여기고 학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며.
▽우리를 ‘불량감자 1호’라고 부른다=공대 정원이 갑자기 늘기 시작한 첫 세대인 92학번 공대생들의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선배들이 붙인 별명이라고.
▽훌륭한 홍삼 증포 기술자가 없었다면 거상 임상옥도 없었다=TV드라마 ‘상도’에서 상인 임상옥이 인삼 기술자를 대우해줬기 때문에 인삼으로 거부가 됐다며.
▽빨리 미국으로 와라=미국에선 엔지니어의 대우가 좋으니 미국 여자 엔지니어와 결혼하라는 미국인 교수의 조언.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실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린다며.
▽신문에 내 이름을 싣지 말라=하라는 실험은 안 하고 딴짓했다고 교수님에게 야단을 맞는다며.
▼기술 인재, 대학과 교수들이 나서 육성해야▼
주승기/서울대 교수 재료공학
우리 경제의 근육질은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이다. 모두 세계적인 기술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산업 중 순수 우리 기술로 이뤄진 게 얼마나 될까.
아마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가진 기술의 대부분은 선진국의 기술을 들여다 발전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선진기술을 들여올 수 있는 수준의 이공계 인력을 필요로 했고 대학의 연구 기능은 철저히 무시됐다. 대학도 산업현장을 도외시한 채 자신의 학문에 안주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망국적 이공계 기피 현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제 와서 이공계 기피니, 위기니 하는 이유는 한국의 산업이 세계적 기술 수준에 육박하면서 더 이상 선진기술을 도입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세계 수준의 자체 기술을 개발해야 할 처지에 놓이다 보니 이공계 대학생 수가 몇 명이고, 이들의 수준이 어떤지 걱정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수 인력의 이공계 기피 현상을 과도기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력의 일본과 노동력의 중국 사이에 낀 우리 처지를 생각한다면 결코 묵과할 수 없는 긴박한 생존의 문제다.
대기업은 선진기술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국산 기술로 승부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기생하여 생존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독자기술 개발로 시장을 개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공계 학생을 위한 장기 비전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장학금이나 병역 혜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공계 학생들을 잠시 묶어두려는 단기적인 처방이며 특혜에 가깝다. 이공계 전문 인력을 키워내는 게 대학 교수들의 일이라고 본다면 교수들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공계 위기의 책임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그저 그런 이공계 인력이 아닌,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을 대학에서 키워내기 위해 대학과 교수들이 나서야 한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파악하고 해당 기술을 확보한 대학의 연구실에서 전문 인력을 육성해야 한다.
이를 통해 관행화된 기업의 신입사원 재교육 부담을 없애고 학생들을 기업에서 꼭 필요로 하는 기술로 무장한 이공계 전문 인력으로 키
워낼 수 있을 것이다.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은 기초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부과정보다는 지도교수의 책임 하에 연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대학원 과정에서 수행해야 한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과 이 기술을 특화시킨 대학 연구실을 연계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글로벌 무한기술 경쟁’이라는 냉엄한 사각의 링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의사 경영자 법률가가 아니다. 오로지 첨단기술로 무장한 이공계 전문 인력인 것이다.
주승기 서울대 교수
▼특별취재팀▼
▽팀장=신연수 경제부 기자(차장급)
▽경제부=김태한 이은우 고기정 박 용 기자
▽사회1부=전지원 기자
▽동아사이언스=김훈기 이충환 기자
※과학기술과 이공계 문제에 대한 제보와 의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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