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의 개인 돈을 모아 전문가가 대신 굴려주고 그 수익을 나눠주는 간접투자상품인 ‘펀드’. 주로 증권가만의 관심사로 치부됐던 펀드가 최근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법의 규제를 받는 투자상품부터 이른바 ‘민경찬 펀드’식의 은밀한 사설투자조합(부티크)에 이르기까지…. 계(契)도 사설펀드의 한 범주다. 뉴브리지 소버린 등 외국계 거대 사모(私募)펀드는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흔들 정도로 영향력이 세졌다. 바야흐로 펀드가 산업화하고 있다. ‘펀드시대의 빛과 그늘’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펀드라는 말 대신 사설투자조합이라고 해 주세요.”
공모(公募)와 사모펀드를 모두 운용하는 한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민경찬 펀드’ 파문 이후 털어놓은 말이다. 법적 규제가 전혀 없는 사설투자조합과 자산운용업법의 규제와 감시를 받고 운용·판매되는 펀드상품을 구별해 달라는 주문이다.
주식과 채권 중심으로 운용되던 펀드상품의 투자영역이 크게 넓어지고 있지만 ‘옥석’을 제대로 가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는 펀드=3월경 통합 자산운용업법이 시행되면 투신사는 기존의 주식 채권펀드 외에 부동산 파생상품 실물자산(금 은 등)펀드를 만들 수 있다. 심지어 개인투자자의 돈으로 광업권 어업권 영화대본에도 투자할 수 있게 된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멀티플렉스사업이 유망할 경우 부동산투자펀드로 영화관을 살 수 있다. 좋은 목을 골라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는 디벨로퍼 역할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색펀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 해양수산부의 설립인가를 받은 선박 투자펀드 ‘동북아 1호’는 펀드자금으로 유조선을 건조한 뒤 이를 현대상선에 빌려주고 용선료(傭船料)를 받는다. 일반투자자들도 3월 중 일반공모를 할 때 선박펀드에 투자할 수 있다.
맥쿼리신한인프라스트럭처운용이 2002년 말 설정한 ‘도로 펀드’는 일종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펀드. 19개 연기금과 금융기관이 주주로 참여한 사모펀드다.
인터넷 등을 통해 투자자금을 모아 영화제작에 투자한 뒤 수익을 나누는 영화펀드(네티즌펀드)는 사설투자조합 형태의 펀드. 이익 분배과정에서 분쟁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 펀드에 투자하나?=“저금리 기조가 정착하는 가운데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직장 없이 살아야 할 여생(餘生)도 길어진다. 이러니 전문가에 맡기는 펀드 간접상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해균 삼성투신운용 상무)
작년 한 해 은행예금은 31조원이나 늘어났다. 하지만 이 가운데 60% 이상이 ‘잠깐 맡겨두는’ 머니마켓펀드(MMF)와 수시입출식 예금(MMDA)에 들어 있다. 투자처를 찾지 못하면서 시중자금이 부동화(浮動化)되는 것이다.
한국은 전체 개인 금융자산 중 60% 이상을 은행예금에 넣어두고 있다(작년 9월 말 현재). 이 때문에 푸르덴셜 피델리티 등 외국의 자산운용업계는 한국의 개인 자산운용시장에 주목하고 있다.
▽안 좋은 기억도 많다=투자신탁협회에 따르면 국내 전체 펀드 투자금액은 지난해 말 현재 145조360억원으로 1년 전과 비교해 29조1380억원(16.7%) 감소했다. 펀드 상품의 전성기였던 99년 7월의 260조여원에 비하면 무려 절반 가까이 급감했다.
펀드상품에 대한 이미지는 대우그룹 부실채권이 대거 편입된 ‘대우채 펀드’ 파문 이후 급격히 나빠졌다. 대우그룹에 이은 하이닉스, SK글로벌, LG카드 등 잇따른 대형 기업의 부실은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으로 여겨오던 채권형 펀드의 원본 손실을 초래했다. 주식형펀드 고객들도 2000년 주가급락으로 원금 손실이 커지면서 발이 묶였다가 최근 원본이 회복되면서 빠져나오고 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