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권재판소(ECHR)가 1월 말 선진법치국가 독일의 자존심을 크게 뒤흔드는 판결을 한 가지 내렸다. 그것이 통일 과정에서 미결로 남았던 재산권 문제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건의 내용과 배경은 이렇다. 1990년 통일과정에서 동서독 정부는 ‘소련 군정(1945∼49년) 하의 토지개혁을 통해 몰수됐던 토지의 재산권은 원소유자에게 반환되지 않는다’는 기본방침에 합의한 바 있다. 통일과정이 원만히 이뤄지려면 반세기 가까이 해당 토지를 점유해 온 동독민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조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럴 경우 평균 8ha씩 배분받았던 약 30만명의 동독 농민이 이 토지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갖는지가 ‘미결’로 남았던 것.
이들 토지는 토지개혁 당시 매도와 임대가 불가능한 일종의 ‘경작권’ 형식으로 배분됐다. 그 뒤 세 차례의 법령 개정을 통해 해당 토지의 소유권은 국유화되거나 협동농장에 귀속됐다가 통일이 임박한 1990년 3월 16일 일명 모드로브 법을 통해 토지 처분에 대한 모든 제한이 철폐되면서 사실상 소유권이 인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통일조약이나 부속 법률의 어디에도 이들 재산권의 상속 문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극심한 혼란 끝에 독일 의회는 1992년 재산권수정법을 제정해 정리기준을 확정했다. 그 핵심은 첫째, 모드로브 법 시행 전날인 1990년 3월 15일까지 토지공부상의 소유권자가 생존해 있어야 하고 둘째, 상속인이 동독 지역에서 농업이나 임업, 기타 식품산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거나 과거 10년 이상 종사한 경우에만 상속권이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ECHR의 심판청구인인 얀처럼 상속권이 부인된 동독민이 5만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극렬하게 반발했으나 독일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반복된 소송에서 일관되게 ‘합헌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러다 마침내 ECHR가 독일 정부의 조치와 근거 법률에 대해 ‘재산에 대한 평온한 향유권’을 보장한 유럽인권 규약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내려지기에 이른 것이다.
동독 체제 하의 관계 법령 미비와 그 집행상의 문제, 특히 토지공부의 불명확성을 악용한 부당한 재산권 취득을 막아야 한다는 정당한 정책목적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획일적으로 상속권을 전면 부인한 조치는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 판결은 인권 이념의 보편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아무리 바쁘고 어려운 통일후속작업이라도 국제인권법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선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내적 통일’ 작업을 마무리해 가던 독일 정부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두려움을 갖고 당황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닌가. 훗날 통일한국에서는 북한 정권에 의해 몰수됐던 토지가 원소유자의 상속권자들에게 반환돼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얀의 상속권’이 인정될 수 있는지, 인정된다면 그 전제인 소유권 관계는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지 등 도무지 정리되고 준비된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덕연 연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