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전남 순천시 송광사(松廣寺)에서 불일암(佛日庵)에 오르는 산길에 눈이 내리고 쌓였다. 남녘에 내리는 눈은 온순했다. 조용히 내리고 그렇게 쌓여 간간이 부는 바람에도 사위는 적요(寂寥)했다. 암자의 문턱에 대나무 숲이 촘촘하다. 숲새에 난 길로 흰눈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탈(脫) 세간(世間)의 소로(小路)다.
법정(法頂) 스님이 17년간 홀로 머물렀다는 암자 앞마당에 잎 떨군 후박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스님은 10여년 전 암자를 떠났지만 스님이 심었던 나무는 세월만큼 자라 맞은편 조계산(曹溪山) 등성이를 바라보고 있다. 세간의 객을 맞은 덕현(德賢) 스님에게 세속의 물음을 했다.
“스님, 이렇게 혼자 계시다 보면 외롭지 않습니까?”
스님이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외로움 또한 우리가 사물을 상대적으로 대하는 데서 생기는 게 아닐까요. 나와 너, 나와 나무, 그렇게 말이지요. 나를 드러내고 앞세우는 자아(自我) 대신 나를 안으로 끌어들여 자아의 깊숙한 뒤편에 도달할 수 있다면 나와 너, 나와 나무도 일체가 될 수 있지요. 그럴 때의 혼자는 외로움과는 다른 편안함, 아늑함을 가져다줍니다.”
열반(涅槃)에 이르는 적정(寂靜)의 세계를 세속의 마음으로 어찌 접할 수 있으랴. 오히려 잠시나마 잊고 싶던 세간의 소음이 귓가에 살아날 뿐.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귀에 지금 불일암 대나무 숲이 내는 소리가 들릴 리 없다. 내밀한 일체의 편안함도 느낄 리 없다. 정치권 모두 매한가지다. 어디라 가릴 것 없이 국민과 민생을 위해 총선에서 이겨야 한다고 하지만 그 아우성은 눈 내리는 산사(山寺)의 적요함이 주는 감동의 한 자락도 따르지 못한다.
▼실속 없이 시끄럽기만 ▼
오직 나와 네가, 내 편과 네 편이 있을 뿐이다. 상대를 이겨야 하기 때문에 ‘올인’을 해야 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을 탄핵하고 총선을 보이콧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와중에 정작 국민과 민생은 부재(不在)한다. ‘친애하고 사랑하는 국민’은 입에 발린 접두사일 뿐이다.
노무현 정권은 1년 내내 ‘지배세력 교체’에 집착한 듯싶다. 조급하고 거칠게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했다. 하기에 그들은 ‘올인’해서라도 총선에서 이겨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대선 승리를 완결 지을 수 있다고 한다. 행정 권력에 입법 권력을 더해야만 완전한 승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정부 여당이 한 묶음으로 기능해 온 권력구조에서 여당이 다수당이 될 때 국정 안정성이 높아질 수 있다.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로 정부가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과거 정권에서 보았듯이 거대 여당은 권력의 ‘난폭운전’을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여소야대(與小野大)는 정부와 국회간 견제와 균형을 바라는 민의(民意)의 소산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노 정권이 3김 이후 우리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 했다면 ‘지배세력 교체’에 매달릴 게 아니라 통합과 상생(相生)의 리더십을 보여야 했다. 그렇지 않고 편협한 ‘코드 맞추기’에 전념하면서 실속은 없이 시끄럽기만 한 1년을 보낸 게 아닌가.
▼중산층은 분해되는데 ▼
총선 승리가 모든 문제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오로지 총선 승리를 위해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 내몰고, 지자체장 끌어들이고, 지지그룹에 시민이란 머리 얹어 총동원한다면 총선 이후를 기대하기 어렵다.
변화는 시대적 요구다. 그 점에서 부패하고 수구적인 우리 사회 구주류의 청산은 필요하다. 그러나 편 가르기로 그것이 이뤄질 수는 없다. 더는 도덕성을 내세울 것도 없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중산층을 두껍게 하고 그들의 개혁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중산층은 10여년 사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노 정권 1년간 중산층 분해는 더욱 가속화됐으리란 지적이다. 이런데도 ‘올인’해 총선에서만 이기면 ‘권력 완성’이라고 할 것인가. 고승(高僧)이 아니더라도 부질없다 말하지 않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장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