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의 흥행 열풍은 우리 사회의 영화보기가 취미나 여가생활 수준을 넘어 심각한 중독 단계에 빠져 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지난해 말 개봉한 ‘실미도’는 연일 흥행기록을 갈아 치우면서 ‘1000만 관객’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경제가 파산 상태에 빠졌던 1999년, ‘쉬리’가 전국 관객 600여만명 기록을 세웠을 때 영화인이나 관객들은 스스로 놀랐다. 저질 퇴폐의 상징처럼 여겼고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구박했던 한국영화가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대리만족'에 빠져드는 사람들 ▼
그러나 결코 무너지지 않을 바벨탑이라고 생각했던 이 경이의 기록을 ‘공동경비구역 JSA’가 1년 만에 바꾸었다. 뒤이어 나온 ‘친구’는 전국에서 820여만명을 동원하는 선풍을 일으켰다. 더 이상의 신기록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한 숫자였다. 하지만 ‘실미도’는 그 숫자를 가볍게 넘었다. 파죽지세의 속도와 뒤집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국영화 관객이 100만명(서울 개봉관 기준)을 넘어선 것은 ‘서편제’(1993)가 처음이다. 1923년부터 영화 제작을 시작한 지 70년 만의 대기록이었다. 그로부터 6년 만에 ‘쉬리’가 그 기록을 넘었고, 다시 5년 만에 ‘실미도’가 또 다른 기록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나 ‘살인의 추억’처럼 500만명 안팎을 동원한 영화들까지 합치면 한국영화의 흥행바람은 광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지난해 프로축구 관중은 240만명 수준이었고 야구도 300만명을 넘지 못했다. 책이나 음반은 100만장만 팔려도 ‘대박’으로 친다. 영화 한편이 다른 업계 전체의 1년 실적을 넘기는 기록을 줄줄이 쏟아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건강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영화만큼 국민이 열광하는 것이 로또복권과 텔레비전 드라마 빼고 또 있을까.
‘실미도’의 관람등급 나이에 이르지 못한 15세 미만의 청소년, 영화를 보기 어려운 노인, 취향이나 생활여건 등의 이유로 극장에 가지 않는 사람을 빼면 4800만 전체 인구 중 잠재적인 영화관객은 2000만∼25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거의 절반이 실미도를 봤다는 얘기다. 500만∼1000만명의 국민이 특정 영화의 주술에 ‘걸려드는’ 현상은 “한국영화 수준이 좋아졌다”는 평가와는 별도로 뭔가 심각하고 불안한 요인을 배태하고 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환상을 판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동이나 열광의 실체는 풍요로움과 정의, 자극적인 쾌락 같은 것들을 대신해주는 카타르시스다. 여유롭게 즐기는 한편의 영화는 생활의 에너지가 될 수 있지만 지나치게 몰입하고 열광하는 것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맹목적인 추종이거나 도피일 가능성이 더 크다. 불안하고 어두운 시대일수록 영화에 대한 열광이 넘쳤던 것은 세계영화 역사가 증명한다.
▼영화가 현실 대신해주진 않아 ▼
최근의 영화 열풍이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를 계기로 불기 시작했지만 갈수록 더하는 정치부패, 극단적인 편 가르기, 내 몫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리더십을 잃어버린 대통령의 경박한 독선 등이 국민을 더욱 영화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닌지. 관객은 권력의 완력 앞에서 꼼짝 못한 채 죽음으로 내몰리는 ‘실미도’의 주인공 처지를 지켜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우격다짐 앞에 버둥대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복권이 많이 팔린다고 경제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드라마 시청률이 높다고 문화수준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며, 한국영화가 호황이라고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과 중독은 오히려 우리 사회의 불안이 그만큼 심각함을 뜻한다. 영화가 현실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조희문 상명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