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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이성형/'配電 민영화' 성공사례 드물다

입력 | 2004-02-10 18:47:00


요즘 친구를 만나면 이런 농을 한다. “한국전력에서 배전사업이 분할되면 재빨리 양초산업에 투자를 해.” 친구는 어리둥절해 한다. “틀림없이 대형 정전사태가 생길 것이고, 단기적으로 양초 수요가 급등할 거야. 게다가 최근엔 정전사태가 거의 없어서 가정용 양초를 비축하는 집도 별로 없잖아.”

그제야 친구는 제법 심각한 듯 내 말을 받아들인다. 정말 옛날 시골에서 쓰던 석유등잔이나 호롱불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민영화와 탈규제를 통해 탈근대를 모색했던 전력산업은 바야흐로 새로운 중세 시대로 후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뉴욕-런던 '대형 정전사태'의 교훈 ▼

작년만 해도 대형 정전사태가 뉴욕을 필두로 런던 코펜하겐 말뫼, 그리고 이탈리아 전역과 스위스 일부 등에서 발생했다. 전철이 멈췄고, 현금자동지급기가 꺼졌으며, 냉장고 속 고기가 상했다. 그것도 버젓한 선진국의 대도시에서 말이다. 저 멀리 중남미까지 거론하면 대형 정전사태의 예는 끝이 없다.

잦은 정전으로 유혈사태까지 겪었던 도미니카공화국은 지난해 9월에 민영화했던 배전회사 두 곳을 다시 국유화했다. 지분매입과 부채인수로 정부의 재정도 막대한 부담을 안게 됐다. 가격인하의 성공사례로 분류되는 아르헨티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잦은 정전사태에 대해 벌과금을 부과하고 전력요금 인상을 거부하자 전기회사들은 시장에서 철수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전력산업의 탈규제와 민영화가 가져온 결과는 무엇일까. 전력가격은 올랐고, 수급은 더욱 불안정해졌으며, 대형 정전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소비자는 잦은 정전과 가격인상에 불만을 품고 있다. 미국 제조업계의 대기업들은 정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아예 전력설비 일관체제를 자체 도입한다고 한다.

민영화에 뛰어들어 재미를 보려던 수많은 전력판매사들도 도산했다. 도매시장에서 비싸게 사서 계약된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다 보니 파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된 것이다. 발전 배전 송전의 세 곳 모두에서 구멍이 뚫리니 당국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오로지 인수합병 그리고 매각을 통해 금융자산 불리기에 성공한 몇몇 회사들이나 과점적 담합으로 높은 가격에 전력과 서비스를 파는 회사들만 승자의 반열에 낄 수 있었다.

‘경쟁과 효율성’이란 말은 사실상 봉토 분할의 새로운 중세적 투쟁에서 성공한 기업의 독과점적 지대를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민영화와 탈규제의 선봉장이던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의 보고서마저 최근에는 전력산업 민영화와 탈규제 프로젝트에 오류가 많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들 보고서는 전력산업의 시장 설계가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렵다고 지적한다.

첫째, 발전 부문의 가격경쟁은 기술적으로 어렵다. 전력은 실시간에 수급 균형을 맞춰야하기 때문에 거대 기업의 시장력 행사가 대단히 쉽다. 전력 도매시장이란 사실 거대 기업의 가격표가 주도하는 일방적인 시장이다. 피크타임에 폭등하는 도매가격을 소비자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소위 ‘정보의 불균형’ 문제도 있다. 규제기구는 대체로 기업에 비해 인력과 정보에서 뒤지기 때문에 시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

▼세계은행도 '戰力 재편'오류 인정 ▼

둘째, 송배전망은 단순한 전력 수송망이 아니라 모든 발전소와 소비자 사이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섬세한 조절체제다. 송전선 한 부분의 사고는 곧바로 전체에 파급된다. 송배전망의 증설과 유지 보수는 비용 개념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설비의 노후화, 병목현상 등으로 대형 정전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한반도는 계통망이 고립된 섬과 같은 지형으로 발전이든 배전이든 분할이 되면 5, 6개의 지역봉토체제가 될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싸고 좋은 질의 전력을 공급받고 있고, 정전도 거의 없는 이 좋은 환경을 굳이 뒤흔드는 정부의 의도가 뭔지 심히 의심스럽다.

정부의 배전분할 방침은 마땅히 철회돼야 한다. 수많은 외국의 실패 사례를 보고도 배우지 못한다면 눈 뜬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