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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지오그래픽]백담사 계곡

입력 | 2004-02-11 18:39:00


《건축을 ‘무의미한 공간을 의미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행위’라고 한다면 ‘길’은 그 ‘의미 있는 공간’에서 태어나는 역사를 풀어낼 실타래다. 길은 공간을 나누고 나뉜 공간은 길로 연결된다. 그 길로 사람이 오가고 역사란 무릇 사람의 오고감에서 이뤄지니 세상사 모두 길을 통해 이뤄진다 하겠거늘. 그래서 길은 여행이요 여행은 곧 역사다. 여행길에 뭇 세상이 비로소 의미 있게 다가옴은 이런 이치리라. ‘코리안 지오그래픽’은 ‘길’을 주제로 주변 만물의 의미를 새롭게 짚어보는 여행이야기로 꾸며진다. 》

한겨울 내설악 백담사로 오르는 계곡 길. 용대리(강원 인제군) 국립공원 매표소부터 백담사까지 왼편에 계곡을 끼고 오르는 길(7km) 주변은 온통 하얗게 눈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시절은 이미 입춘이 지난 2월 중순. 기온과 풍경은 한겨울이라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햇볕에서는 봄기운도 느껴진다. 산등성 눈밭에는 먹이 찾아 헤매던 산토끼 발자국이 여전히 어지러이 찍혀 있다. 그러나 계곡 양지 녘의 바위틈 얼음장 아래로는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크다. 겨울은 이제 흘러간 옛 노래인 듯하다.

백담사 계곡은 설악의 주봉 대청의 낙수를 실어 나르는 내설악의 중심 계곡. 대청봉 훑은 물이 가야동 계곡에 흘러들고 이 계곡이 수렴동 물을 섭렵한 뒤 내리닫이로 곰골 길골을 차례로 얻고 백담사 위에서 흑선동의 물까지 받아들이니 백담사를 지나 이룬 한 물은 예서부터 백담계곡을 이루며 용대리를 향해 진격한다.

수심교 건너고 백담사 나서는 저 스님. 일주문 앞에 두고 어떤 생각하실까. 세상 업보 짊어지고 구절양장 계곡 길로 절찾아 오르는 속세 중생들 맞으러 가시나. 조성하기자

한겨울 백담사를 찾아 오르는 이 계곡길 걷기(트레킹). 사찰 그 자체보다는 절이 들어선 내설악의 속살과 용대리로부터 이어지는 백담사 계곡의 설경을 감상함이 주된 목적이리라. 그리 가파르지 않으며 용이 틀임하듯 굴곡져 수려한 계곡, 사찰버스 외에는 차량통행이 없어 좋고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겨울정취 물씬 풍기는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

계곡에는 사연도 많다. 한 양반이 명당 터 얻었다며 좋아라고 양지바른 계곡 물가를 파다가 땅속에서 발견한 관을 열자 학이 날아가 패가망신했다는 학바위골, 장가 못 든 청년의 주검을 내다버린 계곡에서 한 스님이 극락왕생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를 올리자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는 청룡담 등등.

그 계곡에는 20세기 말 반도에서 일어난 비극의 일단도 걸쳐져 있다. 세인의 눈을 피해 무려 2년1개월간 백담사로 피신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끝이 없는 ‘5공 업보’ 스토리다. 우연일까. 백담사 계곡 여행 이야기를 쓰는 오늘도 전씨 일가의 5공 업보 스토리가 각 신문을 장식한다.

남설악의 구중심처 백담사 절앞 계곡. 바위틈 얼음장에서 물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이런 뉴스가 아니라도 백담사에서는 늘 ‘전두환’이란 이름이 회자된다. 불국사에서 김대성(절을 지은 이)을 떠올리듯 백담사에선 늘 그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런데 백담사가 어떤 절인가. 만해(한용운) 선사(1879∼1944)가 스님이 되는 비구계를 받고 조선불교의 정신혁명을 주창하던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며 시 ‘님의 침묵’을 쓰고 그 시집을 만들던 기개어린 만해 사상의 산실이 아니던가.

만해기념관은 외면한 채 존칭이 생략된 채로 이름 석자로만 불리는 전직 대통령 내외가 거쳐간 법당 앞 요사채(화엄실)만 찾는 속절없는 행동. 양지바른 기념관 앞마당에 있는 만해 흉상과 시비(詩碑)는 외면한 채 그늘져 냉랭한 요사채 툇마루의 한 끝, 달력 한 장 달랑 걸린 전씨 내외의 빈 방 찾아가 닫긴 문 굳이 열고 들여다보고는 백담사를 다 본 양 만족한 표정을 짓는 속인들.

절에 가면 내 종교와 상관없이 으레 부처님 모신 법당부터 찾기 마련. 그런 통상의 예의도 백담사에서는 보기 힘들다. 법당에서 모신 국가보물 목조아미타불상보다도 처마 밑에 내걸린 전 전 대통령 낙관이 새겨진 현판 ‘極樂寶殿(극락보전)’이 더 관심사다.

전직 대통령과 얽힌 기묘한인 연으로 절 외양까지 화려하게 변해 고찰의 운치는 사라지고 찾는 이마저 만해를 외면하는 세속 풍진이 풀풀 날리는 오늘의 백담사. 그러나 세속의 소행이 절 마당에서 버젓이 이뤄져도 고찰 백담에서 용맹 정진하는 운수납자를 통해 맥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법맥만큼은 사라지지 않는 법. 꼬박 한시간반은 걸어야 오르는 내설악 이 깊은 골짜기 길을 늙으나 젊으나 걸어올라 절 찾는 정성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으니 이 모든 것이 예서 수행하며 설악 정기를 민족정기로 되 바꾼 선사의 말과 글 행동, 더불어 만해를 통해 이 땅에 전해진 부처의 말씀 덕분 아닐까.


인제=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