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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분노·후회·한숨…비리연루 '어제의 VIP들'의 수감 생활

입력 | 2004-02-12 15:44:00


《지난해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검찰 조사 직후 투신자살 한 데 이어 4일 안상영 부산시장이 수감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자살 동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 그러나 주변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죄인’으로 취급받게 된 데 따른 모멸감,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사안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대선자금 불법 모금사건 등 각종 비리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서울구치소에는 정치인이나 기업인, 고위공무원들로 붐비고 있다. 수감된 ‘범털’들만으로도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돈다.

VIP 대접을 받으며 일생을 살아온 이들 거물급 인사는 수사과정과 수감생활을 하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화려한 인생 뒤에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높으신 분들의 그때 그 이야기.》

●‘범털’들이 추락할 때

5년 전 비리사건에 연루돼 수감생활을 한 기업인 A씨는 두 번 다시 그때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건에 휘말리게 된 데 대한 후회와 분노,수사과정의 모멸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죠. 아직도 수시로 소름이 돋곤 합니다.”

대질 심문에서 말할 때마다 수사관에게 “장사꾼인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면박을 받았다. 당뇨증세가 심했지만 수사기밀 유출방지라는 이유로 의사도 불러주지 않았다.

가장 수치감을 느꼈던 것은 조사도중 화장실을 보내주지 않아 결국은 바지에 실수를 하고 만 것. 그래도 직원들을 호령하던 중견기업 대표인데, 용변도 가리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 사실은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2년 전 MCI코리아 대표 진승현씨에게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수감됐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당시 얼굴빛이 새까맣게 될 정도로 속을 태웠다. 식사와 잠을 제대로 못한 것은 물론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는 것.

권씨는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천하의 권노갑이가 어린애 돈 5000만원을 먹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러다 홧병으로 죽겠다”고 호소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그의 말은 ‘푼돈’에 손상된 체면을 견디기 힘들다는 뜻으로도 들렸다”고 전했다.

그는 무죄판결로 3개월여 만에 풀려나 정치활동 재개를 선언했지만 현대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다시 구속 수감됐다.

경찰 고위직에 올랐다가 2년 전 두 달여간 구치소에 수감됐던 B씨의 경우. 측근은 당시 그에 대해 “마치 10층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심경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B씨가 가장 괴로워 한 것은 조사를 위해 검찰과 구치소를 오갈 때. ‘잘 나가던’ 고위직에서 하루아침에 포박당한 모습으로 전락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그는 무죄확정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수감 기간에는 물론 석방 후에도 주변에서 찾아오는 것을 꺼려했다. 한 지인은 “석방 후 인사드리려 했더니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말만 측근을 통해 들었다”며 “만나면 아무래도 당시 일을 언급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존대 형에서 호통 형까지

검찰 관계자들은 거물급 인사일수록 수사나 수감과정에서 쉽게 무너진다고 입을 모은다.

“아무리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조사실 문이 닫히는 순간 나약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죠. 처음 며칠은 호통을 치다가도 특별대우 없이 보통 피의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더라고요.”

고위인사(VIP)들은 사회에서 몸에 밴 습관이 교도소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꼼꼼한 성격 탓에 교도관들의 방 검사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평소 정리정돈을 잘하기 때문에 조금만 물건이 흐트러져 있어도 “도대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장세동씨는 교도관들에게 높임말을 해가며 식기 닦기나 빨래도 직접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은 눈에 이상이 생겨 외부 병원 진찰을 가야했는데 장씨가 “나 때문에 5, 6명의 교도관들이 고생을 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마다했다고 한다.

반면 공직자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치소 생활을 한 이모씨는 기관장을 불러 달라, 방문을 잠그지 말라, 갑갑하다며 닦달해 지금까지도 교도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같은 VIP라도 얼굴이 알려졌느냐 아니냐에 따라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대북송금 특검 수사로 구치소에 수감된 고위 공직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수감자들에 의해 ‘신고식’을 치를 뻔했다. 다행히 특검 수사관이 “이분은 이러이러한 분”이라며 말려 봉변을 피했다.

●고위층의 병치레는 진짜?

멀쩡하다가도 죄만 발각나면 입원을 하거나 병보석으로 나오는 고위층의 행태는 ‘쇼’일까.

일선 교도관들이나 검찰 수사관들은 “엄살이 아닌 진짜로 아픈 것”이라고 본다.

수사과정이나 감방 생활을 겪으면서 정신적인 충격, 가족이나 회사에 대한 걱정, 명예 실추 등이 한꺼번에 몰려와 병으로 나타난다는 말. 또 조사 중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을 경우 그 파장을 감당하지 못해 극심한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교도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교도국장을 지냈던 이순길씨는 지난 해 펴낸 ‘교도소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의로 범법 행위를 한 사람은 잘못하면 교도소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가 있지만 이들 ‘범털’ 재소자들은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이런 심적인 갈등이나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으며 노이로제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한 후 일정기간 치료를 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져 꾀병이 아니냐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