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친북’을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반미친북 분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자 좌파 논객들이 일어나 현재의 반미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일방주의 외교에 대한 반감의 산물일 뿐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하며 추기경이 바로 그러한 짓을 일삼는 ‘수구언론’의 포로가 되었다고 흥분했다. 심지어 YS와 DJ 밑에서 각각 부총리를 지낸 한 인사도 등장해 추기경을 비난하고 지금의 반미는 민족자존의 표현이라고 강변했다.
▼남침-북한실상 외면한 교과서 ▼
이들의 주장대로 현재의 반미는 반(反) 부시 대통령이며 따라서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올해 말 미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사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당 정권의 등장은 반미 기운을 일시적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지만 뿌리를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반미현상은 보다 구조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한 의식조사에서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대답한 지도 꽤 됐다.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학설이 박살난 지 오래건만 한국의 시계는 지금 거꾸로 돌고 있다.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의 원인 규명을 위해 고교 교과서의 관련 부분을 모두 읽어 보았다. 기가 막혔다. 6·25전쟁에 관한 서술은 부실 그 자체였다. 대한교과서가 발행한 ‘한국 근현대사’는 전체 320여쪽 중에서 단 두 쪽만을 6·25전쟁에 할애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남침이라는 서술은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6·25전쟁 관련 교육이 이전에는 ‘국사Ⅱ’의 필수과목이었지만 최근 실시된 7차 교육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라는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
서울대 사대 국정도서편찬위원회가 엮은 ‘도덕’ 교과서를 살펴봐도 통일의 당위성만을 강조할 뿐 인권탄압, 식량난 등 북한의 실상에 대한 기술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남북한 공히 문제 있는 체제라는 식의 경계인적 서술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어찌 보면 우리 젊은이들이 민족 공조를 선호하고 반미친북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문제의 교과서들은 모두 교육인적자원부의 검정을 거친 것들이다. 집필진의 대다수는 사대 또는 교대의 교수들이다. 이들이 좌파사상에 물들어 이런 식의 어이없는 집필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과서를 독과점적으로 집필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집착이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시행된 통일지향적 교육지침과 야합한 결과라 여겨진다. ‘이념과 밥통의 기묘한 결합’인 셈이다.
우리는 남북관계도 발전시켜야 하고 통일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가안보의 모태가 되는 국민 안보의식이 해이해지는 것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은 환영할 만한 사건이었지만 그 시간 무대의 뒤편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국가정보원장이 회담 현장에서 북한 최고지도자와 귓속말을 나누는 장면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국가 지도부가 이럴 정도니 일반 국민들이 유일한 동맹국을 최대의 안보위협국으로 여기는 현상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정치권 왜 문제제기 안하나 ▼
그런데 정작 심각한 것은 그 어떤 정치집단도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 집권세력은 최근의 반미친북 분위기를 은근히 즐기고 있으며 자정능력을 상실한 한나라당은 제대로 된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친 노동 정책도 좋고 분배 중시도 좋다. 시장이 제대로만 작동된다면 언젠가 편향이 시정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안보는 다르다. 한번 흐트러지면 좀처럼 추스르기 힘들다. ‘남조선’의 극적인 변화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 평양정권을 생각하니 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