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도 부르는 곳도 없던 나흘. 목적 없이 거리를 떠돈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거리를 맴돌다 집에 들어갔을 때 보금자리의 소중함이 새삼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17일 현재 전국의 기소 중지자(속칭 수배자)는 모두 13만여건. 기소중지자란 고소 고발을 당한 사람이 출두요구서를 받고도 경찰서 등에 나오지 않아 나타날 때까지 사실상 수사가 중단된 사람들을 말한다.
비록 고소 고발은 당했지만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죄가 있는지 여부도 아직은 알 수 없는 사람들.
이 중 10만4000여건이 단순 사기 및 횡령 사건이며 빌린 돈을 기한 내 못 갚거나 떼먹어 고소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간의 일인데다 수가 너무 많아 강력범죄처럼 전담반이 편성돼 추적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기소 중지자들은 일단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중에는 진짜 사기범도 있지만 실직, 부도 등의 이유로 제때 돈을 마련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도 상당수라고 경찰은 말했다.
집을 떠나 거리를 떠도는 10만여명의 사람들. 서울 종로경찰서의 협조를 얻어 수배자 생활을 체험했다.
왜? 누구라도 돈을 못 갚아 고소를 당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니까.
○가상설정
체험을 위해 죄명을 ‘사기’로 설정했다. 도피 기간은 4일.
가족만 빼면 아무 곳에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경찰은 집을 제외하고는 실제 ‘수배자’ 추적과 동일하게 기자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휴대전화 번호, 자주 가는 인터넷 사이트의 ID 및 비밀번호, 차량소재지, 연고지 등 도피자의 동선 파악을 위한 기본 자료는 미리 준비했다.
시작하자마자 잡힐 경우 체험 자체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경찰 추적은 현장 검거 직전까지만 이뤄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찰은 ‘원하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는 상태였다.
○갈 곳이 없다.
시작은 거창했는데 막상 집을 나서고 나니 갈 곳이 막막했다. 희한하게도 발길이 집과 회사, 자주 가던 친구 집 주변과 학교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맴돌았다. 이런 현상은 4일 내내 지속됐다.
나중에 경찰 설명을 들으니 연고지와 사람의 지리감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 무인도에 틀어박히면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찾을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먹고 자려면 돈이 필요하고 사건 진행에 대한 상황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멀리 떠날 수가 없다는 것. 또 본능적으로 길을 잘 모르는 곳은 안 가게 돼 보통은 집 주변을 떠돌게 된단다.
사건만 생기면 연고지로 형사가 출동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쫓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
일단 사우나, 게임방을 갔지만 지루해서 4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거리로 나왔지만 뭘 해야 할지 정하지도 못하고 집 근처 서울지하철 2, 3호선 교대역에서 광화문까지 걸었다.
첫날 오후부터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은 친구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는 추적된다는 것을 알지만 모두 안 받을 수도 없다. 취재에 주변 반응도 포함될 뿐더러 실제 도피자들도 대개는 공중전화를 이용하지만 걸 수 없는 번호(구내전화라든가 발신지 미표시 같은)로 뜰 경우 받을 수밖에 없다. 수배사건 진행에 대한 급한 연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삼촌과 가장 친한 친구들과 후배 등 4명. 실제로 하룻밤 잠을 청하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할 사람들이었다.
무슨 요구르트 광고도 아니고 어쩜 저렇게 콕 찍을 수 있지?
○"자수해라" 친구의 권유
살다보면 말은 맞지만 감정이 안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한 친구가 한참 말을 듣더니 “야! 자수해라”라고 말했다.
원칙은 맞는데 순간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든다. 내 친구들은 모두 숨겨줄 줄 알았는데….
도피 도중 깨달은 또 한가지는 알던 술집 주인이나 마담 같은 사람들을 찾게 되고 친구나 선후배들은 오히려 연락하기가 어렵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이것도 인간의 본능이 만들어내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한다.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이 심적 불안감을 줘 술 생각이 나게 만든다는 것. 거기에 회사 일에 얽매인 친구들과는 달리 심야에도 볼 수가 있어 만나는 데 부담이 적단다.
신창원 탈옥 당시 다방, 유흥가, 창녀촌 등이 주요 수색 대상이 된 것도 이런 특성 때문.
여관, 게임방, 친구 집을 돌며 사흘이 지나자 지치기 시작했다. 실제 도피자 같은 절박함은 없지만 막막한 일상을 견디기가 어렵다.
경찰은 “대부분의 수배자들이 검거 시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고 털어 놓는다”며 “집 나간 지 며칠 만에 스스로 지쳐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 순간 경찰은….
나름대로 잘 도망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었다.
경찰은 일단 한 달간의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회와 주변 조사를 통해 평상시 기자의 동선과 연락할 만한 대상을 6, 7명으로 압축했다.
통화내역으로 경찰이 파악한 평상시 동선은 오전 9시 전후 출근, 출근 코스는 교대역∼반포대교∼삼각지∼광화문, 근무 시간의 이동지역은 일정치 않으며 월, 화 오후 9시 이후에는 항상 집에 있다는 것.(‘대장금’ 때문이다)
심지어 보통 새벽 1시반 이후에 잠들고 불규칙적으로 평일 저녁 시간에 압구정동에 자주 가며(다니는 헬스클럽이 그곳에 있다) 매주 토요일은 오후에 출신 대학에 간다(정기적인 모임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실제 도피 기간 중의 동선도 교대역, 강남역, 출신 대학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 인터넷 사이트 접속 조회를 통해 교대역 근처의 한 PC방에서 이틀째 밤을 새운 것도 파악됐다.
“둘째 날 새벽에 PC방을 나와 사우나 갔죠?”
PC방은 조회가 가능하지만 사우나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놀라 반문하자 경찰은 “밤새우고 새벽 5시에 갈 곳이 뻔하지 않느냐”며 “근처 사우나 한두 군데만 출동했어도 잡혔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죄 짓고 갈 곳은 정말 없었다.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