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 있는 국보 제205호 중원고구려비 앞에서 이화여대 신형식 교수가 비석의 훼손된 흔적을 가리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충주=정양환기자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의 입석마을 근처 삼거리.
도로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누각 안에는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높이 2m 정도의 비석이 하나 있다. 비석의 상단부엔 먼지가 뭉친 듯한 찌꺼기가 여기저기 끼여 있고 새똥이 흘러내린 듯 비석 곳곳에 하얀 얼룩이 말라붙어 있다.
이것이 남북한을 통틀어 한반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인 중원고구려비의 모습이다. 국보 제205호.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에 맞서 고구려사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정작 국내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의 관리상태는 이처럼 허술하다.
전문가들은 중원고구려비나 서울 아차산 일대 보루성(堡壘城) 등 한강 이남의 고구려 유적들이 보존은커녕 심각한 훼손 지경에 놓였고, 발견된 유물들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자동차 매연에 훼손되는 비문=14일 오전 이화여대 신형식(申瀅植·사학과) 교수 등과 함께 찾은 중원고구려비는 국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낡은 누각은 곳곳에 금이 가 위태로워 보였고, 주위엔 지붕의 장식들이 부서져 뒹굴고 있었다.
신 교수는 “도로와 누각 뒤편 주차장의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이 비석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비석이 세워지고 발견될 때(1979년)까지 1400년가량의 세월보다 지난 20여년 간의 훼손이 더 심각하다”며 안타까워했다.
동행했던 충주박물관 길경택(吉俓澤) 학예실장도 “비석의 훼손 속도가 빨라지면서 판독이 가능한 400여자의 글자가 전체적으로 뭉개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나 누각 안으로 쉽게 드나들며 비석을 만질 수 있는 것도 문제. 지키는 사람도 없고 누각 왼편의 나무 창살 중 일부가 조금만 흔들면 빠져 ‘개구멍’이 된다.
충주문화원 김영대(金榮大) 사무국장은 “허가 없이 탁본을 뜨거나 함부로 비석에 손을 대는 사람들을 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하도 많이 탁본을 떠 비석의 앞면이 시커멓게 변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아차산도 상태가 심각하긴 마찬가지. 보루를 쌓았던 석재가 시민들의 등산로를 보강하는 재료로 쓰였고, 성 내부에 철봉과 벤치 등 체육시설이 버젓이 들어서 있다.
서울시가 부랴부랴 아차산 유적의 보존에 나서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상당부분 훼손됐다.
▽팔짱 낀 정부=문화재청이 고구려비 보호를 위해 쓰는 예산은 마을 주민에게 매달 관리비 명목으로 주는 3만원이 전부. 반면 정부는 북한의 고구려 유적 보존을 위해 2000년부터 해마다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를 북한에 지원하고 있다.
충주시 최용태(崔容泰) 문화관광과장은 “누각을 다시 짓거나 비석 자체를 딴 곳으로 옮기는 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지만 절차상의 문제로 쉽지가 않다”면서 “문화재청의 지시를 받아 누각을 다시 짓는다 해도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黃平雨) 소장은 “우리나라엔 고구려 전문 박물관은 고사하고 남한의 고구려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통계도 없는 상태”라며 “한반도 전체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정확한 조사도 없이 중국의 논리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충주=정양환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