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허턴
◇시간을 발견한 사람/잭 렙체크 지음 강윤재 옮김/296쪽 1만1000원 사람과책
서구사회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무너뜨린 세 명의 영웅이 있다. 지동설(地動說)을 설파해 인간이 서 있는 이곳이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일깨워 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진화론을 통해 인간이 신의 완제품이 아니라 시간의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미완성품임을 폭로한 다윈이 그들이다.
미국의 과학역사학자인 저자는 그 영웅이 셋이 아니라 넷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네 번째 인물은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지식인이자 지질학자인 제임스 허턴(1726∼1797)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천문학을 통해 기독교적 공간을 허물었다면 허턴은 지질학을 통해 기독교의 시간 개념을 무너뜨렸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동쪽 경계에 있는 아서즈 시트산의 암벽 솔즈베리 크랙. 제임스 허턴은 솔즈베리 크랙의 지형연구를 통해 지구의 나이가 그때까지 추산되던 것처럼 6000살 미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됐을 것이라는 영감을 얻었다.사진제공 사람과책
허턴이 등장하기 전 지구의 나이는 6000살을 넘지 못했다. 17세기 초 아일랜드의 어셔 주교는 ‘성경’의 시간을 계산해 천지창조의 첫날을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오전 9시로 못 박았다. 17세기 초판이 발행된 ‘킹 제임스 성경’은 본문 여백에 이를 포함한 성서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기재했다. 이 일정이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인의 시간개념을 지배했다. 그것은 아담이 930년을 살았고, 노아는 950년, 아브라함은 175년,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는 성경의 문자적 기록을 그대로 역사에 대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의 기원을 캐는 작업이 아니라 예수가 약속한 ‘천년 왕국’의 도래라는 미래 시점을 기준으로 역산(逆算)한 일종의 스케줄 짜기였다.
이런 믿음은 1770년 발표된 독일의 광물학자 아브라함 베르너의 ‘보편 대양설’로 인해 과학적 근거를 획득하는 듯했다. 베르너는 태초에 지구가 대양에 덮여 있다가 물이 빠져나가면서 육지가 드러났고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암석층이 생겨난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처럼 성경에 묶여 있던 시간을 해방시킨 것이 허턴이었다. 허턴은 1784년 지구 내부의 열과 압력으로 오히려 육지가 바다 아래로부터 솟아올랐다가 침식되기를 반복한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허턴의 가설은 학계의 외면을 받는다.
그러다가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하기 1년 전인 1788년 6월 ‘시간의 빅뱅’이 터진다. 증거를 찾아 헤매던 허턴이 스코틀랜드 해안의 ‘시커 포인트’에서 서로 다른 암석층이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한 부정합을 발견함으로써 수십만년에 걸친 퇴적과 침식, 지각변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허턴의 전기가 아니다. 허턴의 이론이 한 세대를 건너뛰어 다윈의 진화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까지의 치열한 지적 투쟁을 다룬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을 빼앗아 목숨을 이어가는 회색 신사들과의 대결을 그린 소설 ‘모모’만큼이나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또 허턴뿐 아니라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 조지프 블랙 등을 낳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와 풍속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