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여권이 신장되면서 간통죄 소송도 급격히 늘었다. 1956년 여성의 권익보호를 위해 문을 연 여성법률상담소의 상담 모습. -‘서울 20세기’ 자료사진
▼原告 和解勸告 拒否▼
五百萬환의 慰藉料 請求 離婚訴訟事件 公判
신형법 제정 후 속출하는 이혼소송 중에서도 이채를 띠운 玄OO(三O=醫大 在學)씨의 五백만환 위자료 청구 및 쌍벌죄에 의거한 최초의 간통소송 사건의 제一회 공판은 어제 상오 十一시 반부터 지법 一호 법정에서 金준원 재판장 주심으로 개정되었다.
증거조사에서 원고측 소송대리인 백정현씨는 피고 韓OO(三七=XXX株式會社 韓國代理人)이 자기 처에게 취한 학대 모욕 악의유기 등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원고측 주장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재판장의 사화(私和) 권고를 거부하고 끝내 五백만환의 위자료를 요청하여 검찰에 제소한 간통죄 소송도 취소 않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는데, 한편 피고 대리인 윤태림씨는 피고의 월수 二만환의 재력으로서는 원고측 요구에 도저히 응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남편의 간통 첫 처벌…여권신장 실감▼
광복 뒤에도 그대로 사용되던 일본 법체계를 탈피해 현행 형법의 모태인 ‘신형법’이 채택 공표된 것은 1953년 10월 1일의 일.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간통죄에 쌍벌주의가 도입됐다.
그 이전엔 간통사건에서 남성은 전혀 처벌되지 않고 여성에 대해서만 처벌이 이뤄져 왔던 것. 이 신형법은 중혼과 축첩이 흔하던 당시 사회풍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남편에 대해서도 간통을 이유로 이혼 소송과 위자료 청구를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의대에 재학 중이던 엘리트 여성 현모씨가 제기한 이혼 소송은 쌍벌주의 채택 이후 최초의 간통사건이자 광복 후 최대 규모의 위자료 소송이란 점에서 뉴스의 초점이 됐다.
결혼 10년차 주부인 현씨는 남편 한모씨의 줄기찬 이혼요구에 불응하며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 왔으나, 53년 10월 남편이 여직원과 혼례까지 올리자 이혼소송을 냈던 것.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은 3500환. 이를 요즘 쌀값(한 가마니 약 20만원)으로 환산해 보면 위자료 요구액 500만환은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2억8000여만원에 해당한다.
이 사건 관련 보도는 2심 공판에서 부인 현씨가 승소하고 200만환의 위자료 지불 판결이 내려졌다는 54년 5월 26일자 기사로 끝난다. 신형법이 톡톡히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이처럼 여성권익 보호에 적잖게 기여해 온 간통죄가 이제는 폐지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제 여권과 가정 보호에 간통죄가 기여할 역할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진보적인 여성계의 이야기이고 보면 세월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