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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시대…](1) 호주제 폐지 “유전학적 호주는 여자다”

입력 | 2004-02-22 19:07:00

사회생물학자로서 호주제 폐지를 옹호하는 최재천 교수. 그는 “지난 몇 년간 내 주장을 단편적으로 접한 뒤 울분에 차서 메일이나 편지를 보내는 남성들의 공세에 시달려왔다”며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등 자신의 책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은 뒤 비판해달라고 당부했다. -김동주기자


21세기 벽두, 한국에서 호주제(戶主制)는 사라지게 될까.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논란은 정치사회적 논쟁이자 힘겨루기다. 전통과 새로운 현실 간의 팽팽한 가치판단 논쟁이기도 하다. 찬반양론 어느 쪽을 지지하든 인문사회학적 틀 안에 제한돼 있던 이 논란의 한복판에 ‘생물학’을 들고 뛰어든 남자가 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崔在天·50) 교수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

사회생물학을 전공한 최 교수는 2000년 ‘여성의 해가 밝았다’는 EBS 방송특강에 나서면서부터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해 여론의 주목을 얻었다. 지난해에는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는 책을 내 여전히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남성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최근에는 ‘호주제 존폐’에 관한 헌법재판소 자문에 응해 “유전적으로나 진화적 측면에서 남성보다 여성의 기여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남성 중심으로 혈통을 기록하는 현재의 호주제는 비합리적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수컷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의 세포 중 세포핵 절반에만 전달됩니다. 핵의 나머지 절반은 물론 미토콘드리아를 포함한 세포질 내의 다른 물질들은 모두 암컷으로부터 온 것이죠. 이런 이유로 생물학자가 동물의 혈통을 밝힐 때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핵의 DNA가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추적해 어느 암컷의 자손인가를 밝힙니다.”

‘아프리카 이브설’(현생인류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근원지는 아프리카 대륙이었으며 어느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조상이 된다는 학설)도 최초의 인간화석 루시의 미토콘드리아 DNA에서 현생인류 모든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와 공통된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최 교수가 세계 동물학계의 까치생태 연구의 중심을 한국으로 옮겨온 것도 북반구 전역에 서식하는 까치의 미토콘드리아를 분석해 세상 모든 까치의 ‘어머니’가 동아시아 까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이나 동물행동학은 그간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돼 왔다. 남성의 바람기를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퍼뜨리려는 수컷들의 행태로 합리화한다든지, 동물세계에서도 강간이 벌어진다든지 하는 연구결과 때문이었다.

“여성계에서 피해의식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바람피우는 걸 남성 중심으로만 생각해서입니다. 도대체 그 수컷의 상대가 누구겠습니까. 수컷이 바람을 피우는 만큼 암컷도 바람을 피웁니다.”

●호주제 폐지는 남성 생존권 보호

최 교수는 누구보다도 결혼제도 예찬론자다. 많은 남성들이 결혼을 인생의 족쇄로 여기지만 사실은 결혼이야말로 남성을 자유롭게 해준 제도라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암컷은 가임기가 되면 그 징후를 밖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인간의 여성은 이를 감추는 전략을 선택했어요. 이 때문에 인간 남성은 자신의 유전자를 수태시켰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성을 선택해 집안에 들어앉히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결혼제도가 없다면 남자는 ‘오늘밤은 어떤 여성을 유혹하느냐’는 고민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진보는 결혼제도의 안정을 기반으로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남성들의 치열한 경쟁 덕분이 아니었을까.

“역사시대에서 남성의 공로를 묵과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그 발전과 진보가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다시 질문해야 할 때예요.”

최 교수는 가부장적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랄 때는 이모들마저 기겁할 만큼 ‘폭군’이었다. 그러다가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전복되는 경험을 했고, 극히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란 부인과 결혼한 뒤에는 아내를 통해 ‘감화’됐다.

“호주제가 폐지돼야 한다는 제 주장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위해서입니다. 수컷의 사망률은 청년기에는 암컷에 비해 3배가량 높다가 장년기에 접어들면 같은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유일한 예외가 한국남자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서 40대, 50대 남자 사망률이 여성의 3배까지 치솟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여성의 시대’를 받아들임으로써 궁극적 평안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시대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모계性 인정 ‘호주제 폐지’법안 국회 계류중

호주제 폐지를 담은 민법 개정안은 지난해 10월 28일 국무회의를 통과했으나 국회 본회의에는 아직 상정되지 못했다. 법안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번 민법 개정안은 △호주 중심의 가족 구성원 개념을 재규정하고 △재혼 가정의 자녀 성을 바꿀 수 있도록 했으며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혼인신고시 부부 합의에 따라 어머니 성도 따를 수 있도록 했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최근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호주제 폐지 법안처리를 “총선 이후로 미루겠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은 당론으로 ‘폐지 찬성’ 입장을 밝혔고, 민주당도 ‘폐지’에 긍정적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 유림의 입장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치관에 혼란을 낳고 가족 해체가 가속화할 것이다.

현행 호주제에서 이미 재산상속권, 거소지정권, 혼인동의권 등 남녀간 지배 종속관계를 만들거나 차별화하는 봉건적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에 굳이 폐기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호주제 폐지로 민법뿐 아니라 관련 시행령과 수많은 법규에 혼선만 야기된다.

페미니스트 등 서구적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할머니 등 모성을 존중해 왔다. 결혼 뒤 아내가 자신의 성을 지키는 한국적 풍습도 결혼하면 남편의 성으로 바꿔야 하는 서구나 일본에 비해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결혼 뒤 아내의 성을 바꾸는 제도를 통해 가계를 유지하지만 한국에서는 성을 바꾸지 않는 대신 호적제도를 통해 가계를 전하는 보완적 요소가 있다.

● 최재천의 입장

호주제가 폐지돼도 여성이 가정을 더 돌보지 않게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여성은 남성보다 가정의 안위를 더 중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암컷의 유전전략을 주식투자에 비유하자면 우수 종목 하나를 골라 집중 투자하는 것이다. 생리주기 한 번에 난자 하나를 배출하는 암컷으로서는 도박할 여유가 없다. 반면 다량의 정자를 배출하는 수컷은 여기저기 소액 분산투자를 했다가 그중 하나에서라도 대박(수정)이 터지면 지분의 절반을 차지(종족번식)하자는 전략이다. 안전투자를 하는 암컷은 진득하게 한 자리(가정)를 지키지만 수컷은 장사가 안 된다 싶으면 바로 다른 곳으로 옮기려 든다. 성(性) 선택을 받기 위해 남성들은 무한경쟁을 벌여왔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경쟁무기는 돈이다. 성공을 위해 남성들은 가정이 파괴되는 위협에 처하더라도 경쟁을 멈추지 않지만 여성은 자녀와 함께 생활 가능한 수입만 보장된다면 경쟁보다는 협력을 택한다. 결국 사회제도 와 상관없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둥지를 지킨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