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 신경림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 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쟁기를 끌면서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이려 하면 가고 워워 하면 서면 된다
콩깍지 여물에 배가 부르면
큰 눈을 끔벅이며 식식 새김질을 할 뿐이다
도살장 앞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두어 방울 눈물을 떨구기도 하지만 이내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한쪽은 식탁에 오르고
다른 쪽은 구두가 될 것을 그는 모른다
사나운 뿔은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중에서
몸은 있으나 꿈이 없고, 식욕은 있으나 생각은 없고, 굴욕만 있으나 저항은 없다.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몸짓이 잘 길들여진 노예와 식민지 백성을 연상시킨다.
저를 붙잡아 길들이려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뜸베질하며, 주린 사자를 뒷발로 날려보내고, 드넓은 초원을 향해 쿵쿵 달려가는 아프리카 검정 물소의 콧김은 얼마나 당당한가.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 번도 쓴 일이 없’는 외양간 일소가 반면교사가 되었구나.
하지만 일소의 저 순박한 눈망울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건 웬일인가? ‘사나운 뿔’보다 ‘사나운 지혜’로 짐승을 상하고, 곤충을 상하고, 물과 구름을 흐리고 결국 저와 세상을 모두 상하게 하고야 마는 어떤 뿔 없는 짐승들의 뜸베질이 자꾸만 떠오른다.
반칠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