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말 최병렬씨가 ‘보수(補修)하는 보수(保守)’를 앞세워 한나라당 대표가 됐을 때 필자는 본란에 ‘최틀러의 초심(初心)’을 썼다. 요지는 최씨가 별명에 걸맞은 리더십으로 한나라당을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쟁(政爭) 정치, 권력투쟁형 정치에서 민생(民生) 정치, 국가경영형 정치로 돌아서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노무현 정권의 분파적 리더십과 미숙한 국정운영에 불안해 하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총선 이후의 그림’까지 그리기 시작하면 거기서 끝일 수 있다고 고언(苦言)했다. 그러나 최 대표는 아무래도 초심을 잃었던 듯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8개월도 안 돼 사실상 밀려나는 비극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남-보수 지지의 '함정' ▼
얼마 전 필자와 만났을 때 최 대표는 총선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요점은 ‘3자 필승론’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호남표를 나눠 먹고 전통적 지지 세력인 영남이 한나라당을 밀어주는 한 원내 과반수는 몰라도 제1당이야 어디 가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 지지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적신호를 가볍게 보거나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대선 때와 비슷한 ‘함정’에 빠져 있었다.
‘함정’에 빠져서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는 법. 그런데 그는 ‘함정’에 빠져 총선 이후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차떼기 당’이란 비난을 듣고 있다고는 해도 영남과 보수세력이 있는 한 총선에서 질 까닭은 없고, 이기고 나면 4년 후인들 기약하지 못하겠는가, 과연 누가 있어 한나라당을 끌고 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싶다. 한 중견 의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외부 인사를 영입해 새 얼굴을 간판으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의견에 그렇듯 소극적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아무리 대선과 총선이 다르다지만 유권자는 후보뿐 아니라 정당의 미래를 보고 투표한다. 이 정당에 과연 수권능력이 있는지, 누가 유력한 다음 대권 후보이며 그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 총선부터는 정당에 대한 투표도 한다.
최 대표는 초심대로 총선 이후를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나라당을 제대로 바꿔 놓고 그것으로 심판받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 했다. 물론 당이 불법 대선자금으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 그의 책임일 수는 없다. 이회창씨가 야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틀러의 비극’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다.
최 대표는 보수(保守)를 제대로 보수(補修)하지 못했다. 물갈이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원내 과반수의 힘을 갖고서도 합리적 보수로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대표적 예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과 이라크 파병 문제다.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는 판에 왜 우리가 총대를 메고 나서느냐, 그러다가 총선에서 표나 잃는 게 아니냐고 할 게 아니었다.
▼국익 위해 단식했더라면 ▼
농촌에서 몇 석 잃더라도, 파병 반대 세력의 비난을 받더라도 보수정당으로서 나라를 위해 이것만큼은 한나라당이 책임지고 반드시 비준해야 한다고 했어야 했다. 대통령의 특검 거부에 맞서 단식하기보다는 국익을 위해 단식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정치적 탈옥(脫獄)’으로 비난받는 서청원 의원 석방결의안 건도 그렇다. 미지근하게 만류할 게 아니라 단호하게 안 된다고 못을 박았어야 했다. ‘서청원 죽이기’에 앞장서는 것 같아 못 본 척한대서야 제대로 된 보수의 리더십이 아니다. 찬성표를 던져 놓고도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재빨리 사과성명을 내는 몇몇 소장파 의원들의 모습도 꼴불견이다. 그러나 끝내 ‘창(昌) 탓’을 하다가 그런 기회주의자들에게조차 등 떠밀리는 처지가 됐으니 ‘최틀러’가 무색할 지경이다.
결국 ‘최틀러’는 지난 세월에나 통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최틀러’의 비극은 거기 있지 않을까.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