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배 교수가 24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학생들이 땀흘려 조사해 제출한 현장 보고서 더미를 보여주고 있다. -박주일기자
“학생들을 편안하게 하려고 포퓰리즘 식으로 강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취업난 탓에 대학이 학원화되고 학생들은 손쉽게 학점을 딸 수 있는 수업에만 몰리는 요즘, 김왕배(金王培·45)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간 큰 교수’로 불릴 만하다.
주로 3, 4학년생이 듣는 ‘산업사회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A4용지로 100쪽 이상의 보고서를 쓰게 하기 때문. 보고서는 책을 요약하는 수준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람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는, 발품과 땀내가 밴 기록이어야 한다. 이 보고서들은 처음 본 사람에겐 한 권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 정성스레 준비된 원고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도 김 교수의 강의는 학생들로 넘쳐난다. 교양 과목을 강의할 때는 300여명이, 전공 선택 과목 강의에는 다른 학과 학생들을 포함해 70여명이 몰리곤 한다. 수업 분위기도 진지하다.
그의 첫 수업 주제는 늘 ‘과제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과 실천’으로 정해져 있다. 먼저 학생들로 하여금 숙제를 통해 자아를 실현해 가는 과정과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김 교수는 ‘양질(量質) 전환의 법칙’을 믿는다고 한다. 보고서는 양이 많아야 하며 많은 양의 숙제를 하다 보면 언젠가 ‘도가 트듯’ 질적 도약이 이뤄진다는 것.
“보고서에는 현장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으라고 주문합니다. 학생들이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삶의 폭이 넓어진다고 믿습니다.”
김 교수는 연세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토종 학자로서 미국 시카고대에 조교수로 초빙돼 학생들을 가르친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시카고대에서도 그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양의 숙제를 냈다. 나중에 뉴욕의 한 회사에 취업한 학생에게서 ‘교수님이 내준 엄청난 숙제를 한 경험이 직장생활에 너무나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올해 연세대를 졸업해 취업한 한 학생도 “김 교수의 수업을 통해 돈 주고 살 수 없고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얻기 힘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