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가 순해지는 데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어난 것도 한몫을 했다. 과연 소주의 도수는 어디까지 내려갈까.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dom
《평소 소주 애호가로 자처하는 본 기자, 요즘 심기가 불편하다. 국내 소주 회사들이 일제히 소주의 도수를 22도에서 21도로 낮춘 것이다.
이건 음모다. 도수가 내려가면 생산원가도 떨어지고 한 병이라도 더 팔릴 거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나처럼 높은 도수의 소주를 찾는 주당들의 설 자리가 계속 좁아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 주당들은 대부분 소주로 술을 배운 ‘소주 세대’다. 지난해 한국인들은 1인당 연간 약 60병의 소주를 마셨다.
술은 한 사회의 특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바로미터. 국민주(國民酒)인 소주가 순해지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에 대해 소주 업체측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들의 설명을 소주회사 마케팅 팀장 ‘한소주’라는 가상인물과의 대담으로 꾸며봤다.》
그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한 병이라도 더 팔까를 궁리하는 게 일. 하지만 전공이 전공인지라 음주 행위의 사회학적 함의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왔다고 한다.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자꾸 도수를 낮추나. 기자 주변 사람들은 주당들을 무시한 처사라며 분개하고 있다.
“우리가 낮추고 싶어서 낮추는 게 아니다. 시장이 순한 술을 원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거의 독점 상태다. 굳이 낮은 도수의 신제품을 내놓고 모험할 필요가 없다. 독점 상태를 그래프로 그려서 보면….”
(내공이 만만찮다. 경제학 공부도 한 듯싶다.)
―이제 22도 소주는 안 만든다고 들었다.
“몇 해 전 22도 소주를 처음 내놨을 때 우리도 놀랐다. 그렇게 순식간에 빨리 퍼질 줄 몰랐다. 한국의 술 문화가 얼마나 획일적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게다가 보통 사람이 1도차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25도 소주가 그리운 건…
진짜 구별이 안 될까. 시음을 해보기로 했다. 눈을 가린 채 22도와 21도 소주를 마셨다. 본 기자, 세 번 모두 정확히 구별해냈다. 새로 나온 21도 소주는 육체가 학습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기대했던 수준의 자극을 주지 못한다. 혀도, 목젖도, 식도도 모두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아, 대학 시절 마시던 25도 소주가 그립다.
“소주가 아니라 그 시절에 대한 향수(鄕愁)일 뿐이다. 실제로 마시면 다들 힘겨워한다. 또 25도 소주도 아직 나오긴 나온다.”
―도수가 왜 내려가는지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말해 달라.
전공을 살린, 사회학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소주가 국민주로 떠오른 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다.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후딱 취해야 했다. 또 술자리에 안 가면 다음날 대화에 못 낄 정도로 술자리 네트워킹이 중요했다. 생존을 위해 술을 마셨고 그러면서 ‘피 같은 술’이니 하는 식의 알코올에 대한 몰입이 일어났다. 센 술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최근 소주업체들이 일제히 소주 도수를 21도로 낮췄다. 소주 원조격인 23도짜리 진로 소주(왼쪽)와 21도 산소주.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dom
○산업화가 끝나면서 순해져
―산업화가 끝나면서 소주도 순해진다는 건가.
“빙고! 90년대 이후 3차 산업 인구가 크게 늘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본격화됐다. 이젠 일방적으로 술이 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주량의 차이를 인정해준다. 웰빙이다, 뭐다 해서 믿을 건 자기 몸밖에 없다는 생각도 퍼지고 있다. 스타일 구기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게 취하는 게 대세다.”
―진짜 그러냐? 기자 주변에는 여전히 ‘마시고 죽자’는 식의 술자리가 많다.
“기자(를 둘러싼) 사회가 유별난 거다.”
―그렇다면 소주의 도수는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떨어진다는 얘긴가.
“‘이건 소주가 아니다’라고 소비자들이 느끼는 경계가 있을 거다. 20도 안팎이 되지 않을까 싶다.”
소주회사는 고객들을 모아 매달 실험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입맛의 변화를 찾아내고 도수를 떨어뜨리는 시점을 정한다는 것이다.
―고객 의견은 어떻게 반영되나.
“다양한 사람들로 표본을 구성하고 평균치를 내 입맛의 변화를 알아낸다. 하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신 같은 ‘헤비 유저’들의 의견이다. 인구통계학적으로는 30대 남성 직장인이다.”
―위스키나 코냑과 달리 소주는 폼이 안 난다. 혼자 앉아서 홀짝거리고 있으면 영락없이 알코올 중독자 취급 받는다. 왜 그런가.
“값이 싸서 그렇다. 소주가 10만원쯤 해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한국에선 법적으로 마음대로 소주 가격을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 소주 회사가 지금까지 버텨온 건 피나는 원가 절감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술이 들어간 탓일까. 그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증류주가 맥주보다 더 싼 나라는 한국뿐이다. 값이 싸다고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소주만큼 순수하고 숙취가 없는 술이 있나. 와인이나 막걸리 마시고 취해봐라, 얼마나 괴로운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국에서 소주는 영원한 ‘조연’이다. 술 마신 다음날 ‘어제 △△ 소주 마셨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저녁을 먹었고 소주 한 잔 했을 뿐이다. 하지만 소주에 대한 한국인의 사랑은 각별하다. 가끔 해외 교포라면서 ‘정말 소주가 마시고 싶다’며 울먹이는 전화가 오기도 한다. 그럴 땐 보람을 느낀다.”
인터뷰가 길어지면서 빈 병도 늘어갔다. 애초에 가졌던 분노는 동지애 비슷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소주 애호가들은 맥주는 배가 부르고, 독주는 너무 빨리 취한다고 말한다. 소주가 사람 사귀기엔 가장 적당하다는 의미다.
도수가 낮아졌어도 소주는 여전히 소주. 시간이 흐를수록 혀도, 두뇌 회전도 점점 무뎌진다. 본 기자, 불콰한 얼굴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과연 소주가 순해지는 게 먼저인가, 주당들이 약해지는 게 먼저인가.”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