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왼쪽부터) 김가현 이혜원씨가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들은 '육아는 필수, 사회활동은 전략'이라고 말했다.
《잘나가는 직장 여성이 있다고 하자. 결혼해 아이를 가진 뒤 육아 여건이 마땅치 않아 회사를 그만뒀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아이를 키웠다. 사회로의 복귀를 생각한다. 그러나 두렵기만 하다. 과연 사회가 나를 받아줄까. 한국사회 ‘평균 여성’의 고민일 것이다. 여기에 소개할 여성들은 그런 점에서 용감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의 손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자발적으로 육아에 전념한 점이 우선 그렇다. 그 후 닫혔던 사회의 문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열쇠 삼아 다시 열어낸 점도 그렇다. 이들 여성은 ‘인생 제3막’을 훌륭하게 펼치고 있다.》
○ 직업은 파트타임, 육아는 풀타임
이혜원씨(36)는 현재 두 개의 공식적인 직업과 한 개의 부업을 갖고 있다. 동네 유치원의 영어교사와 이경민 코스메틱의 마케팅 담당 부장을 겸하고 있으며 때로 번역 아르바이트도 한다.
이씨의 전직은 홍보 전문가. 한국에서는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사회정책연구원)과 홍보대행사 엑세스 커뮤니케이션에서, 미국에서는 레블론 화장품 본사에서 홍보를 맡았었다.
그러나 그는 ‘원형이 엄마’라는 타이틀을 가장 좋아한다. 이제 세돌 반 된 원형이가 삶의 보배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았을 때는 결혼 5년 만이었어요. 남편 사정상 미국에 가서 살 때 레블론에 취직했는데 아무래도 한국보다 임산부에게 유리한 근무환경이어서 미뤄 오던 아이를 가졌죠.”
웃는 모습이 개구쟁이 같은 원형이가 9개월 된 무렵 한국에 돌아왔다. 미국에서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던 이씨는 한국에서 ‘전업주부’를 선택했다.
“내 커리어도 중요했지만 아이가 더 중요하더군요. 공백기 뒤에 다시 일자리를 찾게 될지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자’고 마음먹었지요.”
아이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보니 아이가 언어 구사력도 좋아지고 심리적 안정감도 찾는 것 같았다. 그렇게 1년 반을 보내고 아이가 동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자 이씨는 그 유치원의 영어교사가 됐다. 일주일에 두 번 오전시간에만 나가고 아이와 함께 출퇴근한다.
지난해 여름 이경민 코스메틱에 취업할 때도 마찬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주 3일 출근하기, 오전 10시∼오후 6시 근무시간 준수하기, 해외출장 가지 않기.
“풀타임잡을 갖고 싶죠. 일에 내 인생도 걸고 싶고. 그러나 저녁에 아이와 함께 그날 서로가 한 일을 이야기하고, 책 읽고 잠드는 시간을 놓친다면 후회할 것 같아요.”
그는 스스로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유치원 교사 일을 하는 월, 수요일 중 하루는 오후 1시 반에 아이와 함께 퇴근해 극장이나 국립공원에 가서 문화생활을 즐긴다. 책방에서 오후를 다 보내는 경우도 있다. 토요일에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원형이 엄마’가 아닌 ‘이혜원’으로 돌아가 친구를 만나고 쇼핑도 한다.
“한국에서는 아이도 잘 키우고 직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둘째는 도저히 꿈도 못 꾼다”는 게 이씨의 말.
○ 수입 아동복 가게 창업 '사장님'
김가현씨(32)는 졸업 직후 결혼해 아이를 낳은 전업주부였다. 지금은 서울 압구정동에서 수입 아동복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이다. 이 일대에 수많은 수입아동복 가게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의 가게는 2001년 개점 이후 적자를 내본 적이 없다. 아는 선배와 함께 각각 자본금 7000만원을 투자해 지금껏 추가자본을 대지 않고도 잘 굴러간다.
이처럼 사업 수완이 뛰어난 김씨는 ‘바깥일’이 늘 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여섯 살이라고 육아가 끝나는 건 아니지만 아이가 유치원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자신에게도 여유가 생길 것으로 기대했던 터였다.
“아이를 별나게 키우진 않아요. 치과의사인 아이 아빠 일로 몽골과 캐나다에 4년간 나가 있을 때도, 한국에 돌아와 강원 원주에 살 때도 아이가 개울이나 놀이터에 나가 자연과 더불어 놀도록 하는 것뿐이었지요.”
아이는 잘 자라줬다. 또래 아이들보다 덜 경쟁적이고 여유가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자기 이름만 쓸 줄 알았지 알파벳도 몰랐지만 3학년인 지금은 학교에서 중위권을 유지한다.
“처음에 아동복 가게를 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말렸지요. 그런데 아이 아빠만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빌린 돈 6000만원을 내주면서 ‘이 한도 안에서는 다 잃어도 좋다’고 했어요.”
그는 최대한 리스크를 덜 지는 방식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압구정동 일대의 다른 옷가게와 달리 ‘럭셔리하게’ 보이기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옷장이나 책상 같은 가구는 ‘망했을 때’를 대비해 동업자와 절반씩 떼어갈 수 있도록 맞춤식으로 짜뒀다.
옷을 들여올 때도 한 번에 몇 장씩 소규모로 자주 산다. 장사는 재고관리가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 이런 방식은 영국의 ‘아큐아스큐텀’ 매니저인 한국인이 구매를 대행해주는 시스템을 도입한 덕분이다. 김씨는 한 번도 옷을 사러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
또 고급 수입아동복 가게들과 달리 드라이할 옷은 취급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싸고 실용적인 것으로 강남 고객층을 파고들었다.
김씨와 동업자는 일주일에 3일씩 가게를 본다. ‘파트타임 사장님’인 셈이다. 이런 김씨도 최근 다시 일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6개월 된 둘째 아이가 점점 커가고 첫째 아이도 공부에서 엄마의 손길이 더 필요해진 것 같기 때문.
“전 요리를 좋아해 음식공부를 해볼까도 해요. 남편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서너 가지 추려본 뒤 계획을 세워 진행하라고 하지요. 제 인생이 3막에서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재취업, 닫힌 그 문을 두드리며
김현경씨(32)는 임신 8개월 때까지 산에 올라야 했다.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 여행전문 기자였기 때문. 첫째 아이를 낳은 후 누군가에게 맡기고 직장에 복귀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던 김씨는 아예 ‘두 명을 연년생으로 낳고 아이들이 말을 하고, 말귀를 알아들을 때쯤 다시 내 길을 가자’고 작심했다. 연년생 사내아이들을 얻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남들이 쉽게 규정짓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아이가 갖지 말게 하자는 게 제 육아방침이지요. 여섯 살인 첫째 아이는 한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자신의 이름은 아직 쓸 줄 몰라요. 어느 날 아이가 심각하게 ‘사람들이 그러는데 나만 한 나이에는 자기 이름을 쓸 줄 알아야 한대, 엄마 정말 그래요?’ 하더군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라고 말은 해줬는데 이게 제가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기 싫어하는 이유예요.”
김씨가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창작동화 1000권을 읽어줄 계획이다. 읽고 스스로 깨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아이들과 교감을 키우고 있다.
김씨는 현재 신문방송학 박사과정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 아이들이 자는 밤에 온라인으로 강의를 몇 개 들었지만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사회자가 소속이 뭐냐고 묻더군요. ‘주부’라는 타이틀이 내 이름 앞에 붙는다는 걸 그때 처음 자각했어요. 이게 아닌데 싶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죠.” 신문방송학 석사인 김씨는 박사과정을 거쳐 주부에서 벗어나 교수가 되고 싶다.
그는 전업주부로 만 5년을 살아보니 아이들이 예쁘게 자라는 것과는 별개로 ‘사는 게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어느 정도 아이들을 키웠으니 이제 자신의 꿈을 향해 갈 때라는 판단.
“한국에서 주부가 사회에 재진입할 기회는 너무 적어요. 기회가 닫혀 있는 만큼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오래, 깊게 고민한 뒤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일까요. 언제 실현될지는 모르지만 꿈을 향해 지금 나아가고 있으니 살 맛 나네요.”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