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三. 覇王의 길

입력 | 2004-02-26 18:06:00


그때 망이궁 전문(殿門) 안에는 많지 않은 낭관(郎官)과 환관들밖에 없었다. 염락이 군사를 이끌고 대전 앞으로 밀고 들자 놀란 그들이 몰려나왔다. 염락은 군사들을 시켜 그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

낭관과 환관들은 갑작스러운 화살 비에 어찌할 줄 몰라 하며 허둥댔다. 어떤 자들은 크게 겁먹고 달아나고, 어떤 자는 칼을 뽑아들고 맞섰다. 그러나 워낙 염락이 이끈 군사들이 많아 그들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잠깐 동안에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자 그나마 막는 사람도 없어졌다.

대전 안으로 들어간 염락은 황제의 용상이 올려져 있는 단[악좌]을 둘러싼 휘장에다 활을 쏘게 했다. 화살이 휘장을 뚫고 용상 위에 앉아있던 2세 황제의 발 아래로 떨어졌다. 황제가 성난 목소리로 곁에서 시중드는 신하들을 불렀으나, 바깥의 비명소리에 이미 겁을 먹은 신하들은 아무도 나서서 막으려 들지 않았다. 모두 숨어버리고 곁에는 환관 한 사람만 남아 2세를 지켰다.

“염락은 조고의 사위이다. 조고는 짐이 그렇게 불러도 오지 않다가 이제 그 사위에게 군사를 딸려 보내 그 흉측한 마음을 드러냈다. 대전에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용상에 활을 쏘아대는 것을 보니 조고는 짐을 해치고 나라를 도적질하려고 함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토록 엄청난 대역죄가 꾸며져 일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는 느껴지는 기미가 적잖이 있었을 터, 그런데도 그대는 어찌 진작 짐에게 그걸 일러주지 않았던가?”

2세가 용상 뒤로 몸을 숨기며 그 환관을 나무라듯 말했다. 환관이 민망해하는 눈길로 2세를 올려보며 받았다.

“신이 감히 아뢰지 못했기에 오늘날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는 것은 진작부터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만, 만약 제가 조(趙) 승상에 맞서 그걸 폐하께 아뢰었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벌써 조 승상의 올가미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조고가 그렇게 무서웠던가? 조고의 위세가 그렇게 대단했단 말인가?”

“그 모두 폐하께서 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호랑이 앞에 여우가 걸어가면 짐승들은 여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호랑이가 무서워 엎드립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뒤에서 그 일을 오래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마침내 그 위세는 여우의 것이 되어버립니다. 지난 한해 폐하께서는 한낱 보이지 않은 조짐이었고, 우리 눈에 보이는 황제는 조 승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고는 이날을 위해 짐(朕)이란 호칭을 그렇게 풀이했던가. 짐의 위세를 가로채기 위해 짐을 오직 조짐으로써 신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게 했다는 것인가. 참으로 내가 어리석었구나….”

2세 황제가 그렇게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데 염락이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전상(殿上)으로 올라왔다. 뒤따라온 군사들이 어렵잖게 휘장 뒤에 숨어있는 황제를 찾아내 염락 앞으로 끌고 갔다. 염락이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서서 기다리다가, 군사들이 발 아래 내팽개치듯 끌어다 놓은 2세를 쏘아보며 말했다.

“족하(足下=비슷한 연배사이의 존칭)께서는 교만하고 방자하여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데 잔혹하기 짝이 없었소. 이제 천하 백성들이 모두 족하에게 반역하여 들고 일어났으니, 족하 스스로 어찌해야 할지를 깊이 헤아려 보시오.”

그러는 염락은 이미 황제의 신하가 아니라 죄수에게 형벌을 집행하러 온 형리(刑吏)에 지나지 않았다. 2세가 분노를 억누르고 물었다.

“이 모두가 승상이 하는 일 같은데, 짐으로 하여금 먼저 승상을 만나게 해줄 수는 없느냐? 승상을 만나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하겠다.”

“아니 되오. 일이 화급해 그럴 겨를이 없소.”

염락이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단숨에 거절했다. 그리고 비웃듯 덧붙였다.

“그런 한가로운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듯하구려. 족하는 이제 황제가 아니오.”

그제야 모든 일이 되돌리기는 틀려버렸음을 어렴풋이 알아챈 2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그럼 황제의 자리에서는 물러나겠다. 대신 군(郡) 하나를 얻어 그곳의 왕으로 지낼 수는 없겠느냐?”

“그것도 천하 백성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족하께서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너무 심하게 백성들을 들볶았소. 도대체 어느 군에 가서 어느 백성의 왕이 되겠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만호후(萬戶侯)가 되어 남은 평생 의식(衣食)이나마 넉넉하게 살게 해줄 수는 없다고 하던가?”

다시 한참 뒤에 2세가 그렇게 물었으나 염락은 여전히 험한 눈길로 노려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풀이 죽은 2세가 다시 한참을 생각하다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빌었다.

“한낱 이름 없는 백성이 되어 처자를 거느리고 하늘이 주신 목숨이나 누리며 살 수는 없겠소? 여러 공자(公子)들처럼 말이오.”

그러자 염락이 벌컥 성을 내며 소리쳤다.

"나는 승상의 명을 받고 천하를 위해 족하를 벌하여 죽이려고 왔소. 어떻게 죽느냐를 고르는 일 말고는 족하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받아줄 수가 없소!”

그리고는 군사들에게 나아가라는 손짓과 함께 명을 내렸다.

“아무래도 말로는 아니 되겠다.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죄인 호해를 끌어내 목 베어라!”

그제야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2세가 밀려드는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멈춰라! 그게 정녕 짐이 해야 할 일이라면 구차하게 너희들의 손을 빌리지 않겠다. 짐이 스스로 처결할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라.”

그새 황제로서의 위엄을 되찾아서인지 그 말을 들은 군사들이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멈춰 서서 2세를 바라보았다. 2세가 허리에서 보검을 뽑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리쳤다.

“간악한 조고가 내 형 부소(扶蘇)를 죽인 뒤로 우리 영씨(영氏=진나라 왕성·王姓) 핏줄을 수없이 죽게 하더니 이제는 황제인 나까지 죽게 하는구나. 하늘이 있다면 조고는 반드시 영씨의 손에 그 삼족과 함께 죽임을 당하리라!”

그런 다음 날 선 칼날을 목에 대고 길게 그었다. 조고의 꾐에 빠져 형 부소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지 세 해째 8월의 일이었다.

2세 황제 호해가 시뻘건 피를 쏟으며 숨이 끊어지는 순간 제국(帝國)으로서의 진나라도 끝이 났다. 염락이 돌아가 조고에게 호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리자, 조고는 기다렸다는 듯 조정 대신들과 여러 공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놓고 말했다.

“우리 진나라는 본시 천하의 서북쪽에 치우쳐 있는 한낱 왕국에 지나지 않았소. 그런데 시황제께서 천하를 하나로 아울러 다스리셨기 때문에 황제를 일컫게[稱帝] 되었던 것이오. 이제 옛 육국(六國)이 각기 하나씩 자립하여 진나라의 다스림이 미치는 땅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소. 따라서 진나라의 임금은 헛된 이름만으로 황제라 일컬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예전처럼 왕(王)으로 돌아가는 게 마땅하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할 때부터 숨어있는 황제 노릇을 하던 조고의 말을 누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시황제가 만세(萬世)를 이어가기를 바랐던 진 제국은 어이없이도 이세(二世)로 끝나고 말았다.

제멋대로 진나라를 왕국으로 되돌린 조고는 이어 그 왕위마저 자신이 미리 정해둔 인물로 채웠다.

“공자 영(영)은 사람됨이 어질고 너그러우실뿐더러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분이라 백성들이 한결같이 우러르고 있소. 또 그분은 잔악한 호해의 주살(誅殺)을 피해 살아남은 공자 중에 시황제의 가장 가까운 핏줄이 되시니, 지금으로서는 우리 진나라 왕실의 적통(嫡統)이시기도 하오. 그분을 우리 진나라의 왕으로 모시는 게 어떻겠소?”

말로는 묻고 있었지만 그 또한 이미 결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어쩌다 용하게 살아남은 시황제의 조카 자영(子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왕(秦王)으로 정해졌다. 그러자 남은 일은 죽은 2세를 장사지내는 일이었다. 조고는 2세 황제 호해를 평민[黔首]의 예로 장사지내고, 두현(杜縣) 남쪽 의춘원(宜春苑)에 묻어주었다.

호해의 장례가 끝나자 조고는 자영에게 글을 보내 즉위를 준비하게 했다.

묘현의 예란 왕위에 오를 사람이 처음으로 종묘(宗廟)에서 조상에게 제례를 올리고 다시 군신들을 모아 서로 보는 의식을 치른 뒤 옥새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살얼음 판 같은 궁중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빈틈없는 처신 하나로 그날까지 목숨을 부지해 온 자영은 조고로부터 그 같은 글을 받자 반갑기보다는 걱정부터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동안 누구보다 조고의 간교함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영은 조고가 일껏 황제를 시해(弑害)해놓고 왕위를 자신에게 내미는 게 수상쩍었다. 가만히 사람을 풀어 조고 주변을 살피게 하는 한편 관동의 형편도 알아보게 했다. 오래잖아 놀라운 소식이 하나 들어왔다.

“무관 쪽에서 초나라 장수 하나가 몰래 사람을 보내 조고를 만나보고 갔다고 합니다. 조고의 아우 조성(趙成)의 가동(家동)이 귀띔해 준 말이라 믿을 만합니다.”

거기다가 관동의 형세도 심상치 않았다. 장함의 항복으로 진나라의 주력은 사실상 무너진 셈이라 언제 제후군(諸侯軍)이 함곡관을 깨고 함양으로 밀고 들지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자영이 그 두 가지 소식을 모아놓고 앞뒤로 끼워 맞춰보니 조고가 왜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자신에게 떠넘기려 하는지 비로소 알 듯했다. 겉으로는 감격한 듯 재계를 준비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고의 흉계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