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모두 돌걸상에 쇠사슬로 묶여 있어서 조금씩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절대 도망칠 수는 없었지. 한쪽 벽에는 아주 커다란 돌칠판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로 만든 탁자가 놓여 있었단다. 탁자 뒤에는 비쩍 마르기는 했지만 길이가 엠마의 두 배쯤은 되어 보이는 징그럽게 생긴 용이 한 마리 앉아 있었어. 용은 조그만 눈에 번쩍이는 안경을 걸치고 아이들을 쏘아보며 휙휙 소리가 나도록 대나무 회초리를 휘둘렀어. 아이들은 움직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걸상에 똑바로 앉아 있었어.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겁에 질린 눈으로 용을 쳐다보면서 말이야….”
▼동화속 최악상황이 현실로 ▼
‘모모’ ‘끝없는 이야기’ 등으로 유명한 독일의 청소년문학가 미하엘 엔데는 ‘기관차 대여행’에서 극중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부분을 이렇게 풀어냈다. 이야기인즉, 용이 아이들을 납치해 강제로 공부(여기서는 구구단)를 시킨다는 설정이다. 어린이가 납치되는 끔찍한 시나리오는 그 밖에도 많다. 이탈리아의 동화 ‘피노키오’가 그랬고, 19세기 독일의 민화인 ‘소년의 마술피리’가 그랬다. 프랑스의 동화작가 야크 리베의 ‘깜찍이와 복합마녀’에서는 소녀를 납치하려다 번번이 실패한 마녀가 최후에는 선생님으로 변장해 다시 납치를 시도한다.
동화 작가들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최악의 상황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납치’한 기이한 사교육 열풍이 그것이다.
한국교육개발원 통계에 따르면 사교육의 내용이 초등학교의 경우 80.6%, 중학교는 92.8%, 일반 고등학교는 87.8%가 정규 교과내용이라고 한다. 부모들은 아이를 학교에 넣기도 전부터 글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고 산다. 그 후로는 밑도 끝도 없는 선행학습이 이어진다. 비정상적인 일과를 꾸려 가는 아이들은 부모와 대면할 시간조차 없고, 부모는 행여 공부에 방해될까 잔소리도 아낀다. 이렇게 사교육은 학교와 가정을 차례로 삼키고 우리 아이들을 ‘접수’했다.
최근 교육부가 빼앗긴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인터넷과 TV를 활용하는 조치들을 내놓았다. 인터넷을 교육에 적용하는 것은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률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해 봄직한 앞서가는 방식이고, 교육방송의 활용은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전파의 공적인 기능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도 적지 않다.
사교육과 맞서기 위해 TV와 인터넷이 우군으로 뭉쳤으나 사실 그 둘은 특성과 기능이 각각 다르다. TV는 접근하기 쉬운 반면 시청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해소하지 못하는 일방향 매체라는 한계가 있다. 반면 쌍방향 매체인 인터넷은 사용자의 참여가 가능하지만 기술적인 제약과 비용이 만만치 않고 유해 사이트라는 암초도 있다. TV에는 여전히 난시청 지역 문제가 있고, 인터넷에도 정보 격차의 문제가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둘 다 전달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사고와 창의력을 기르는 콘텐츠가 부실하다면 쇠로 만든 상자에 지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두 매체가 융합되는 추세이고 보면, 질 높은 콘텐츠를 개발하고 서로의 매체적인 개성을 보완적으로 살려 간다면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한 청사진이다. 미디어와 함께 자라난 세대에게 미디어는 훌륭한 놀이와 배움의 상대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세대 콘텐츠에 기대 ▼
줄어든 사교육비만큼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학교가 바뀌고, 부모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교육이 추구해야 할 본질과 멀어지면 인터넷보다 더한 첨단의 매체가 나와도 소용이 없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에서 용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조롱한다. “세상에 저런 멍청이가 다 있다니. 제 발로 걸어 들어와 가지고 뭐가 어쨌다고? 너는 함정에 빠진 거라고!” 그러나 엠마와 용감한 아이들은 용의 본색이 기관차임을 곧 알아차리고 그동안 자신들을 묶었던 쇠사슬로 묶어 강물 속으로 집어넣는다. 이런 ‘동화 같은’ 결말도 실제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 박성희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shpark1@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