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서길수 교수가 만주에서 직접 찍어온 광개토대왕비 사진 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은금씨(56). 그는 고구려연구회가 10년간 버틸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해 왔다. -박주일기자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회장인 서길수 교수(서경대 경제학과·60)는 경제사학자이면서도 고구려연구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전문가다. 1989년 한국인들의 접근이 힘들었던 중국 동북지역에 들어간 뒤 94년까지 고구려 첫 도성(都城)인 오녀산성 등 고구려성을 100여개나 새로 발견했다. 94년 고구려연구회가 발족되고 고구려 관련 붐이 일기까지 그의 부지런한 발품은 큰 몫을 했다.
고구려연구회의 진가는 지난해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로 학계가 발칵 뒤집히면서 드러났다. 14명의 연구원을 확보한 이 연구회는 10년간 빠짐없이 학술회의를 열고 250편의 논문이 담긴 16권의 논문집을 발행해 왔다.
3월 1일 발족하는 ‘고구려연구센터’가 국가로부터 100억원씩 지원받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고구려연구회의 저력이 더욱 놀랍다. 그 뒤에는 서 교수의 부인 이은금씨(56)의 공로가 숨어 있다.
연구원들 사이에서 ‘실장님’으로 통하는 이씨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다세대건물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고구려연구회’의 유일한 상근직원이다. 혼자 산더미같이 쌓인 자료를 정리하고 학술논문집의 교열과 편집을 맡는가 하면, 학회 관련 우편물 800여통에 우표를 붙이고 각종 전화문의에 응하며 학술세미나와 전시회, 시민강좌 등의 준비와 안내도 맡는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다 무료봉사다.
고구려연구회는 출범 초기부터 서 교수 부부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굴러갔다. 각종 기업체 강연료와 원고료를 톡톡 털어 1년에 3000만∼4000만원의 운영비를 마련했다. 그러다 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사무실을 좁은 곳으로 옮기고 2명의 상근직원도 줄여야 했다.
“고구려연구회 출범 때 자금 마련을 위해 얼마간 사놨던 땅을 나 몰래 팔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러다간 집까지 팔겠구나’하는 생각에 제가 직접 나섰죠.”
이씨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난 뒤 “실제 이유는 내 남편이 고구려연구의 최적임자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털어놨다.
“고구려연구를 하려면 역사에 대한 지식 외에도 어학능력과 오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체력, 사진촬영기술 등을 두루 갖춰야 합니다. 남편은 경제사학을 전공한 데다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고 다닐 만큼 등산에 능하고 사진도 잘 찍어요.”
99년 연구회를 유지하기 위해 집을 팔고 전셋집으로 이사하는 결정도 남편에 대한 이씨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들은 우리 부부가 돈 문제로 부부싸움을 꽤나 하는 줄 알지만 단 한번도 다툰 적이 없어요. 뜻을 세우고 추진하다 보면 어느새 돈은 쫓아와 주더라고요. 물론 주변에 신세를 많이 지지만….”
소박한 웃음을 짓는 이씨를 보면서 행주치마로 왜군에 맞섰다는 행주산성의 여인들이 떠올랐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 서길수교수가 말하는 ‘나의 아내’
“월급을 준다면 몇 사람 몫을 줘야겠죠. 하지만 월급을 받았으면 받은 만큼밖에 일을 못했을 걸요. 고구려연구회 속사정을 저보다 더 잘 아니까 사재(私財) 털어 넣는 것도 이해해줄 수 있을 거고….”
서길수 교수는 당초 아내에게 3년만 사무실 일을 도와 달라고 했는데 시효가 한참 지나서까지 붙들고 있는 게 미안할 뿐이라며 웃었다.
“아내는 경제학을 공부해 회계에 능한 데다 고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교지 편집을 맡은 덕에 편집감각도 있어요. 고구려연구회에 딱 맞는 이런 직원이 또 있을까요.”
그는 “두 아들 뒷바라지에 고구려연구회 안살림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불평 한 번 없는 아내에게 늘 감사할 뿐”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