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게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과격한 시위대’인 듯하다.
종종 고향을 방문하면 친지들은 ‘무섭지 않으냐’ ‘위험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살고 있는 미국인의 눈에는 CNN 방송 화면을 통해 비치는 한국의 시위 광경이 꽤나 위험해 보이나보다. 나는 “TV에서 보는 것만큼 위험하지 않다”고 대답해주지만 대부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내가 한국에서 겪은 일을 들려준다.
한국지사에 부임하기 전까지 서울을 방문할 때면 호텔에 묵곤 했다. 로비에 앉아 있으면 길 건너 대학교에서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이 사용하는 최루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느 토요일 나는 대학교와 인접한 공원에서 열린 어린이 야구경기를 보러 갔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는 옆 대학교에서 시위가 일어난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대학교 입구 쪽으로 왔을 때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는 상황이었다. 길을 건너려던 나는 그만 시위대와 경찰 중간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 반미(反美)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들과 이를 막는 경찰,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하는 미국인.
“50m만 더 가면 안전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른 학생 한 명이 윗도리를 흔들면서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학생들과 경찰에게 동시에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며 나에게 길을 건너가라고 손짓하는 게 아닌가. 나는 재빨리 길을 건넌 뒤 고마움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잠시나마 ‘나에게 다가오는 그 학생이 혹시 나를 위협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과격하게 변해가는 한국의 시위문화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외국 기업인의 입장에선 시위대 주장의 상당부분에 공감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시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당시 나에게 길을 터줬던 학생으로부터 나는 이방인을 배려하는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1985년 나는 한국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 전까지 한국은 내게 두 가지 측면에서 ‘흑백’의 나라였다. 우선은 6·25전쟁의 빛바랜 ‘흑백’ 사진에서 보듯 ‘후진국’ 이미지가 남아 있었고, 동시에 한국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회세력들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대립하는, 사상적으로 ‘흑백’의 구분이 뚜렷한 사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에 와보지 못한 대다수 외국인이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1988년 이후 한국에 살면서 나는 주말마다 북한산에 오른다. 그곳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내가 한국에 대해 가졌던 고정관념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를 떠올리고 웃음 짓는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사상적으로 더 이상 ‘흑백’의 나라가 아니다. 한국의 젊은이들과 만나 대화하다 보면 그들의 다양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흑백’으로 나뉜 것은 한국이 아니라 나의 사고방식이었음을. 이제 나는 ‘흑백’이 아닌 ‘컬러’ 렌즈로 한국을 들여다본다.
윌리엄 오벌린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겸 보잉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