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가 흥행에 성공하자 국방부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달 25일 영화제작사에서 필름을 빌려다 내부적으로 이 영화의 시사회까지 가졌지만 사실은 2002년 강 감독이 제작 지원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윤무장(尹武長) 국방부 정훈공보관은 “시나리오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주인공의 애인이 처형되는 장면, 주인공 동생이 강제 징집되는 장면, 국군이었던 주인공이 상관을 죽이고 북한군이 되는 장면 등이 문제가 돼 지원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강 감독이 ‘후회할 것’이라고 하기에 ‘후회할 만큼 영화를 잘 만들어 달라’고 말했지만 흥행에 성공할 것으로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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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방부가 이 영화의 제작을 지원하지 못한 가장 큰 속사정은 2000년 다큐멘터리 영화 ‘애기섬’의 아픈 경험 때문이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의 양민학살을 다룬 이 영화에 국방부는 헬기, 막사 등을 지원했다가 보수층 및 정치권으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다.
한 정훈장교는 “‘태극기 휘날리며’가 어떤 반응을 얻을지 알 수 없었고, 논란의 소지가 있다면 지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잇따라 제작된 군 관련 영화는 대부분 국방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영화 ‘실미도’의 경우는 실미도 부대에 대한 추가 증언이 이어져 국방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국방부는 ‘비공개 대북 특수부대가 더 있었다’거나 ‘실미도 부대 생존자가 있다’는 등의 뜬소문을 해명했지만 일각에선 영화 속의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몇 년 전 히트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상영 때는 남북 병사들의 비공식 접촉이란 비현실적 상황이 만에 하나라도 현실화되지 않을까 우려돼 JSA의 근무태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인 두밀령 전투지역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논의가 벌어지는 것처럼 군에 고무적인 움직임이 촉발되는 경우는 드물다.
국방부는 지난해 군이 만든 국방영화나 드라마를 직접 일반 시청자에게 방송하는 위성TV사업을 추진했으나 국회 심의과정에서 효과성 및 수익성 부족으로 올해 예산(74억원)이 모두 삭감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쟁과 군복무를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영화를 통해서라도 군을 이해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군 관련 영화의 잇따른 흥행 성공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들은 ‘그나마 위기 속의 기회’라며 자위하는 분위기다.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