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씨(오른쪽)와 동아일보 전진우 논설실장. 전 실장이 “대담의 긴장도를 높이기 위해 나는 진보 쪽에 서겠다”고 밝힌 때문인지 시종 예리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이훈구기자
《한국사회의 보수 진보 논쟁이 4월 총선을 계기로 정도를 더해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높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맞대기보다는 서로의 오류를 비난하면서 세를 불리려 한다는 걱정이다. 최근 산문집 ‘신들메를 고쳐 매며’를 출간해 현재의 한국을 “네거티브와 포퓰리즘이 횡행하는 사회”라고 보수논객으로서 맹공을 펼친 작가 이문열씨. 그가 “한시적 외도”라며 맡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역할도 마무리돼 가고 있다. 본보 전진우 논설실장이 지난달 27일 그를 만났다. 정치현장에서 다시 점검해봤을 그의 보수적 사회관의 타당성, 보수 진보의 의미와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문열=담배 끊은 지 2년이 됐는데 어제는 옛날 아리랑담배 피우는 꿈을 꿨다. “아, 또 피우고 말았네” 하며 낙담하던 차에 잠에서 깼다. 이제 중요한 공천 심사는 다 끝났다.
▽전진우=대담의 긴장도를 위해 나는 진보 쪽에 서겠다. ‘맞습니다, 맞고요’ 해서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한나라당 싹수가 노랗다고 했는데….
▽이=“싹수가 노랗냐”는 기자의 질문에 “응” 하고 답했을 뿐이다. 한나라당은 바닥을 친 기분이다. 낙관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비관은 이제 끝난 것 같다.
▽전=한나라당 소장파들이 5, 6공 퇴진을 요구하지만 이 선생은 5, 6공이라 해서 반드시 물러나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제대로 된 보수정당이 되려면 희생적 차원에서라도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방금 (당사에서) 그 일 때문에 격론을 치렀다. 김용갑 의원이 그렇다. 소장파한테 물어 보니 누구를 콕 찍어서 물러나라고 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낙천은 과거에 대한 정죄가 돼서는 안 되고 미래지향적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 아직 확정이 안 된 과거사나 막연히 5, 6공 세력이었다는 게 퇴진 이유가 돼선 안 된다.
▽전=이 선생은 ‘보수의 파수꾼’으로서, 또는 ‘보수의 전사(戰士)’로서 ‘위기에 처한 보수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현실정치에 나서는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보수의 위기는 어디서 왔나.
▽이=1960, 70년대 냉전논리가 세계에서 가장 엄혹하게 작동됐던 곳이 한반도다. 남도 북도 냉전체제로 사회를 다스렸다. (한국에선) 과도한 반공주의, 안보를 앞세운 독재논리 등이 권력을 쥔 보수파에 짐이 됐다. 거기다가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없는 나라가 산업화하는 과정에서의 무리도 한국 보수세력에는 부담이 되었다. 사실 보수와 수구 기득권층은 다른 말인데 한국에선 같은 말이 됐다.
▽전=한국에선 그간 반공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장 이데올로기가 박정희 전두환 정권 등의 비민주적 독재 구조로 이어져 왔다. 보수파는 거기 함몰돼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987년 항쟁을 전후해 저항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런 보수파에 대한 불신이 불거져 나왔다. 현재 한나라당은 불신받는 보수의 ‘정당적 표현’ 같은데….
▽이=(우리가) 분단체제라는 걸 인정한다면 서구 시민사회 모델을 갖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에 나름의 민주 진보세력이 자라났다면 모르겠는데, 보수가 이끌어 온 한국에만 민주세력이 자라났다. 하지만 비난은 한국의 보수만 받고 있다.
▽전=보수가 자초한 측면에 대한 자기비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나라당의 대선 연패는 반성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이=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게(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새로운 세력인가, 권력 핵심에 포함되지 않은 또 다른 보수가 대중을 조직한, 그런 정치사의 전개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노태우 정권도 개혁적인 성격이 있었다. 공화국과 헌법을 바꿨고, 인적 청산을 했다. 그 이후의 개혁들도 (그것과) 그렇게 차이 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간 세월을 바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물어 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정권 이름만 바꾸고 똑같은 짓을 해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전=우리는 상대적 개념인 보수 진보를 너무 이분(二分)한 느낌이다.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한쪽으로 치우쳐 중도적 보수가 약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온다.
▽이=반드시 중도적 보수가 가장 큰 선(善)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 봐야 한다. 공자에 따르면, ‘선인과 악인이 모두 좋아하면 좋은 사람이 아니며, 선인은 좋아하고 악인은 싫어하는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결국 사람은 한 성향을 갖게 되는데 만병통치약처럼 이쪽저쪽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가’ 생각한다.
▽전=우리 사회에선 극좌가 진보를, 극우가 보수를 대표하는 것 같다. 그들이 부각됨으로 인해 끝없이 갈등과 분열로 치닫고 있다. 본의와는 달리, 이 선생의 극우 이미지가 부각돼 보수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이=박홍 신부는 그렇게 과격한 인물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학생들한테는 과격한 인물로 비치고 있다. 나도 벌써 그렇게 된 게 아닌가 돌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내가 행동해야 할 때 머뭇거리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워지기도 한다.
▽전=합리적 보수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이=현재 보수세력은 진보에 대해 적대적으로 작동하는 보수가 아니라, 터전조차 위협받고 있는 것 같다. 분단체제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터무니없이 앞질러간 진보는 지금 세상을 기반부터 흔들어 버릴 것처럼 위험하고 불온하게 비칠 때가 많다.
▽전=광복 이후 대부분의 기간을 보수세력이 지배했다. 하지만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보수가 위기에 처했다면 보수 쪽에 뭔가 책임이 있는 게 아닌가.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얼마 전 최병렬 대표가 ‘친북 반미 노무현 정권과 사회단체로 위장한 좌파들이 건전보수 세력을 뒤집으려 한다’고 말했다. 동의하나?
▽이=그렇다. 그걸 가지고 ‘색깔 시비’라며 최 대표를 몰아세우는 데 대해 ‘역(逆)매카시즘’을 느낀다.
▽전=그 우려는 알겠지만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최 대표의 한나라당이 건전 보수라고 자칭하는 게 적절치 않다.
▽이=그래서 한나라당이 지금 찌꺼기를 털어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나도 지금 한나라당이 건전 보수라고는 주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어디에 한국 보수세력을 싣겠나. 미국을 ‘가상 주적(主敵)’이라 하고 방글라데시 노동자까지 걱정하면서 북한 주민 처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그 사람들한테 맡기겠나.
▽전=한국 좌파는 과거 폭압 체제와 보수에 대한 절망에서 생겨난 부분이 있다. 한국 보수는 위기의식을 부각시키기 위해 좌파를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노동당 간부 김철수로 확인된 사람(송두율씨)이 양심적 지식인이 된 사회에서는 좌파의 세력이 과장됐다고 볼 수 없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한강을 건넌 군인은 600명에 불과했다. 거기 비하면 ‘노사모 몇만명’은 아주 위협적이다.
▽전=얼마 전 이 선생은 ‘총선시민연대가 낙선 기준을 세우면 역으로 참고하겠다’ ‘총선시민연대는 열린우리당의 외곽조직이다’ ‘지금의 좌파 진보세력은 패자부활전을 꿈꾸는 하류 지식인이다’ 등과 같은 말을 했다. 너무 일방적 표현 아닌가.
▽이=좋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것이 뭔가. 임기응변력, 정보종합력, 예견력, 친화력, 끝으로 도덕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조건을 다 빼버리고 맨 끝의 것만 따지다니. 당적 변경이나 부패 등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한테만 유리한 기준을, 그것도 편파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패자부활전’은 비유나 상징 같은 것이다. 전부터 나는 모든 혁명은 ‘패자부활전’이라고 말하곤 했다.
▽전=인터넷에 대해 이 선생은 ‘타락한 광장이고 독선적 집단주의가 전체주의를 어른거리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너무 부정적이지 않은가.
▽이=‘인터넷 초기의 혼란이며 이후는 낙관한다’는 조건을 달고 한 말이었다.
▽전=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이 좌파적 성격을 가진 대단히 불안한 정권이라고 했다. 새로 내각에 기용한 이헌재 부총리, 안병영 장관 등을 보면 노 정권도 변하고 있지 않은가.
▽이=나도 이 정권 자체를 좌파라고 한다면 온당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은) 경계와 경고를 위해 과장되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전=결어(結語)로서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보수의 나아갈 길은 무엇인지, 보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말해 달라.
▽이=보수의 ‘자기 규정’이 가장 급하다. 보수주의자는 ‘바보와 악당들만이 역사를 주도해왔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선의를 가진 이들이 노력해 역사를 만들었으나 이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다고 믿으며, 새로 개선될 세계에 대한 기대에 못지않게 지금 이 세계를 만든 사람들의 노고도 기억하겠다는 사람들이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꾸려 나가는 것이 보수적 태도의 첫걸음이다.
정리=권기태기자 kkt@donga.com
▼이문열씨 약력▼
▽1948년 경북 영양 출생
▽1968년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입학
▽197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나자레를 아십니까’)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새하곡’) 오늘의 작가상 수상(중편 ‘사람의 아들’)
▽1982년 동인문학상 수상(단편 ‘금시조’)
▽1984년 중앙문화대상 수상(장편 ‘영웅시대’)
▽1987년 이상문학상 수상
(단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92년 현대문학상 수상(단편 ‘시인과 도둑’)
▽2001년 소설집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출간
▽2004년 산문집 ‘신들메를 고쳐 매며’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