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처음 출근했더니 직원들이 ‘사무실과 자택이 모두 도청되니 주의하라’고 하더라. 각국이 온갖 기술을 동원해 유엔 간부들의 전화를 도청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최근 영국 정보기관의 유엔 간부 도청 파문에 대해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보안 전문가들도 “지구상에 유엔만큼 비밀공작원이 많은 곳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도청의 대상이 됐던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런 ‘전통’을 잘 알기 때문에 이번 파문을 크게 문제 삼지 않으려는 듯하다. 프레드 에커드 유엔 대변인을 통해 “실망스럽다”는 논평을 내고 “도청이 있었다면 중단해야 할 것”이라는 소극적인 발표만 했을 뿐이다.
유엔 간부들이 유선전화나 휴대전화를 쓰면 도청이 쉬운 편이며 보안전화를 쓰더라도 소리 전파가 낳은 미세한 창문의 떨림을 포착해 음성으로 재생해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번에 도청 사실이 알려진 결정적 계기는 영국 통역관 캐서린 건의 고급기밀 누설. 그는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6개국에 대해 도청을 해줄 것을 영국에 요청한 메모를 폭로했다가 기밀누설 혐의로 기소됐다. NSA가 도청을 요청한 시점은 2003년 1월.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전쟁에 대한 안보리의 지지를 얻지 못해 곤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리처드 버틀러 전 이라크 무기사찰단장 역시 “사무실이 끊임없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여럿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민감한 대화를 나누려면 주위가 소란한 유엔본부 지하층 카페나 맨해튼 센트럴파크를 찾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후임인 한스 블릭스 전 단장도 도청을 우려해 유엔본부 부근에서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번 도청 파문에 대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유엔주재 러시아 대사는 “도청은 불법”이라면서 “이번 일로 보면 영국의 도청 기술만큼은 수준급인 모양”이라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기술만 있으면 누구든 도청한다’는 전제가 있는 듯한 말이었다.
1945년 유엔 창설 과정을 담은 ‘창조과정’이라는 책에서 저자 스티븐 슐레진저는 “유엔이 생긴 날부터 도청은 시작됐다”고 썼다. 당시 미국은 3개 기관이 도청을 담당했는데 육군 통신부대는 회의에 참석한 외교관들의 유선전화를, 연방수사국(FBI)은 미국인 방문객들의 전화를 모두 도청했다고 한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