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의 체험과 헝가리 공산정권의 수립과정, 56년 민주화운동 등을 자서전 '위대한 수업'에 담아낸 인텔의 최고 경영자(CEO) 앤드류 그로브와 그의 책의 영문 원서(사진 오른쪽 아래). 동아일보 자료사진
◇앤드류 그로브의 위대한 수업/앤드류 그로브 지음 김이숙 옮김/317쪽 1만2000원 한국경제신문
안드라스 그로프, 헝가리 부다페스트대 화학과 학생. 그는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 당시 시내 중심가의 시위대 대열 속에 있었다. 1987년, 미국 시민 앤드류 그로브는 인텔사의 최고 경영자(CEO)가 됐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한 지 31년 만이었다.
이 책은 ‘인텔 CEO’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그의 경영철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 앞서 나온 ‘승자의 법칙:앤드류 그로브’(한국경제신문·2003)를 읽는 편이 낫다. 새 책 ‘위대한 수업’에서 그는 유년기에서 미국 정착 직후까지의 삶만을 다루고 있다. 본문에 ‘인텔’이라는 이름조차 언급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책의 무엇이 눈길을 붙잡는가. 자서전, 특히 ‘탈출’을 다룬 자서전에는 격변하는 시대 속의 인간 의지를 체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독일어권 유대인의 운명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로잡힌 영혼’은 바르샤바 게토와 경직된 폴란드 공산체제의 사회상을,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 초기의 억압적 상황을 각각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그로브의 이 ‘초반기 자서전’에서 독자는 독일과 소련이라는 강대 세력 사이에서 희생되는 헝가리인의 운명을, 공산체제 수립 과정의 사회적 갈등을 어떤 연대기보다도 치밀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책은 여름밤 도나우 강변 산책길에서 시작된다. 세 살이 된 안드라스는 장난감 스포츠카를 선물 받고 기쁨에 들떠 있지만 어른들의 시선은 밤하늘을 비추는 탐조등 불빛에만 머무른다. 유제품 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어 가고, 남은 가족은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시골로 도피생활에 들어간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파란은 그치지 않는다. 공산당은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를 몰수하고 안드라스는 ‘성분’ 때문에 대학 진학을 보장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경직된 체제 대부분이 그렇듯이 ‘연줄’이 간신히 고민을 해소해 준다.
오페라에 심취하고 로맨스에 빠지고 사회변혁의 열망을 불태우던 대학시절도 잠시. 56년, 그는 소련제 탱크의 굉음에 새벽잠을 깬다. 주변의 친구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갈등하던 그는 마침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다.
대필 자서전에 불과할까? 화학자로 진로를 정하기 전, ‘오페라 가수’와 ‘작가’의 길을 놓고 고민했다는 만큼 의심은 접어도 좋을 듯하다. 미국 이민심사 때 ‘반정부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털어 놓아 퇴짜를 맞을 뻔하기도 했다는 그의 솔직함은 책 내용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유년기에 침대에서 혼자 ‘나쁜 짓’을 하다 엄마에게 혼나곤 했다는 사실도, 보통사람이면 숨기고 싶었을 소련군에 의한 어머니의 능욕까지도 그는 거리낌 없이 털어 놓는다.
책에 ‘인텔 인사이드’ 표시는 없지만, ‘그로브 제(製)’라는 이름에 값하는 치밀함은 보장할 수 있다. 원제 ‘Swimming Across’(2001).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