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을 들으신다면 방문(方文)이나 하나 올리겠나이다. 상한병에는 시호탕(柴胡湯)이요, 음허화동(陰虛火動)에는 보음익기전(補陰益氣煎)이요, 열병에는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이요, 원기부족에는 육미지탕(六味之湯)이요, 체한 데는 양위탕(養胃湯)이요, 다리 아픈 데는 우슬탕(牛膝湯)이요, 안질에는 청간명목탕(淸肝明目湯)이요, 풍증에는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이라. 지금의 병은 만 가지 약으로도 치료가 되지 아니하옵고, 신효(神效)한 것 하나 있으니 토끼의 생간이라. 그 간을 얻어 더운 김에 잡수신다면 즉시 회복되시오리다.”
너무도 잘 알려진 ‘토끼전’의 일부이다. 중병을 앓고 있던 동해 용왕이 온갖 약물이 소용없어 한탄하다가 드디어 토끼의 생간을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듣는 대목이다. 토끼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약물은 조선 후기에 널리 사용되던 대표적인 처방들이었다.
실은 조선의 왕실에서도 자주 사용했던 것들이니, 토끼전이 유행하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왕실 주치의라 할 수 있는 내의원 의관들의 처방전 가운데 상당수가 민간에 번져 나가게 되었다. 내의원 의관들이 왕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마친 후 개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민간에 흘러나간 것이다. 왕년에 내의원에 근무했음을 내세우면 다른 의원에 비해 손쉽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으므로 왕실 처방의 확보는 중요한 마케팅 전략의 수단이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정조 임금은 아예 효과가 높고 안전성이 확보된 왕실의 처방전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 민간에 배포하기까지 했다. 아는 것이 힘이요, 돈이 되는 세상에 내의원 처방을 한두 사람이 전유(專有)한다면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아가 좋은 처방을 백성들이 널리 활용하게 하려는 ‘수민(壽民·백성을 오래 살게 함)’의 마음이었다.
최근 사극 ‘대장금’의 열풍으로 온 나라가 전통의학에 관심이 많다. 특히 조선 왕가에서 어떤 약물들을 복용했는지 궁금해 한다. 근자에 필자는 순조(純祖) 어간에 사용된 왕실의 처방을 조사했다. 순조와 몇몇 왕실 가족에 국한된 조사이기는 하지만 30여년 동안 수천 회의 처방이 확인됐다. 그 결과가 흥미롭다. 처방된 약물 가운데 수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군자탕(君子湯)과 양위탕이다. 이들 약물은 효능이 매우 다양하긴 하지만 식욕부진, 피로회복, 위장치료 등에 주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조선 왕가의 대부분이 운동부족과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만성적인 소화불량 등 위장 질환에 시달렸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장수했던 영조 임금도 군자탕을 퍽이나 즐겼던 모양이다. 하루는 그 효능에 큰 기대를 했는지 반농담으로 이 약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약물의 이름이 군자(君子)이니 이를 먹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는가”라는 것이다. 몸의 불편함을 소인배에, 그리고 이를 제압하는 군자의 이미지를 약에다 빗댄 재치였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만성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업무 스트레스가 조선시대 임금 못지않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임금의 건강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문제였다. 오늘날은 국민 개개인의 건강 문제가 국가적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의 가치가 임금만큼 귀해졌다는 얘기일까.
김호 가톨릭대 교수·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