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은 항상 고통을 수반하는 정책에 소극적이다. 장기적인 파장이 어떻든 우선 인기 있는 정책을 선택하려고 한다. 이런 유혹은 특히 선거철에 더욱 극심해진다. 그래서 표를 많이 모을 수 있는 경제정책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경제문제를 시장이 아닌 정치논리로 접근하면 경제는 여지없이 정치의 덫에 걸려 버린다.
▼눈앞 총선에 경기회생은 뒷전 ▼
이러한 유혹은 선진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과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었던 폴 볼커와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갈등을 살펴보자.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에 임명된 볼커 의장은 1979년 10월의 어느 토요일, 금리를 20% 수준으로 전격 인상했다. 15%대의 고질적인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두 배나 인상한 것이다. 당연히 주택건설은 꽁꽁 얼어붙었고, 소비는 급격히 줄었다. 농부들은 분뇨와 썩은 야채 꾸러미를 워싱턴의 FRB 건물 앞에 쌓아 놓고 시위를 벌였다. 볼커 의장의 초상화는 불태워졌고, 신변의 위협마저 심각했다. 선거를 앞둔 레이건 대통령과 의회는 당장 그를 신랄하게 추궁했다. 당연히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고 실업을 해소하라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2m의 장신인 볼커 의장은 말없이 시가만 피워댈 뿐 정치의 덫에 빠져들지 않았다. ‘충격요법’만이 미국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그의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잠재웠고, 9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을 이끄는 초석이 됐다. 볼커 의장은 레이건 대통령을 애타게 만들었지만, 그가 만든 호황의 공(功)은 훗날 빌 클린턴 대통령이 누린 셈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금융정책의 독립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선진국에서도 정치인의 압력이 거센데, 우리가 언제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우리처럼 경제정책이 정치에 예속된 후진국에서는 선거철마다 정치의 덫에 빠져 곤욕을 치르곤 한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권은 여전히 선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올인’ 작전으로, 야당은 대통령 탄핵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물론 정상적인 정치활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야의 극한대결로 정치권이 불안정한 가운데 경제 각료는 차출되고 장밋빛 공약만 난무한다면, 이것이 곧 경제를 옭아매는 정치의 덫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정치자금에 연루된 기업 수사가 1년을 넘기고 있으니, 덫에 빠진 경제의 심각성은 더 말할 나위 없다. 한마디로 정치가 경제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국가신용도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최근 외국 언론은 우리 경제에 심각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뉴스위크와 파이낸셜 타임스는 대기업 부채로 외환위기를 겪었던 한국이 불과 5년여 만에 다시 소비자 채무로 ‘제2의 경제위기’를 맞고 ‘파산의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01∼2002년의 무리한 경기부양이 가져온 결과이니, 이것 역시 정치의 덫이 아니겠는가. 일본 경제학자 오마이 겐이치도 정치 불안 속에서 정부의 인허가에 기업의 운명이 달린 나라가 어떻게 국민소득 2만달러를 꿈꿀 수 있겠느냐고 지적한다.
▼정책일관성 유지할 제도 필요 ▼
우리 경제는 지금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서 있다. 내수 침체와 투자 부진으로 고용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있지만 수출은 달아오르고, 외국인의 ‘싹쓸이’로 주가도 900선을 뛰어넘고 있다. 20년 만에 다시 찾아 온 해외경제의 호황 속에서도 유독 우리 경제만 내부적인 요인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겠는가.
위기의 원인을 깊게 분석해 보면, 역시 정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제발 경제를 정치의 덫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자. 기업인들도 이제 정치의 덫에서 풀어 놓자. 대통령도, 정치인도 더 이상 경제를 정치논리로 해결하지 말고 시장으로 풀어야 한다. 나아가 정치 불안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갑영 연세대 교수·정보대학원장·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