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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배극인/경제관료의 섣부른 ‘폭탄발언’

입력 | 2004-03-07 19:11:00


금융감독위원회 이동걸(李東傑) 부위원장은 4일 일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폭탄성 발언’을 했다. 이 부위원장은 “삼성생명이 배당보험 계약자에게 돌아가야 할 장기투자자산 평가이익 2조원 안팎을 주주 몫으로 배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작심한 듯 “앞으로 논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책임질 준비도 돼 있다”는 말도 했다.

그의 발언은 큰 파문을 불러왔다. 삼성생명이 배당보험 계약자에게 돌아가야 할 2조원가량을 주주에게 부당하게 빼돌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언론은 이 부위원장의 말을 근거로 삼성을 집중성토했다.

이에 대해 삼성생명은 “평가이익은 실현되지 않은 이익”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설사 주식 등 장기투자자산을 팔아 이익을 실현하더라도 이때 발생하는 처분이익은 평가이익 때와 다른 기준으로 계약자와 주주에게 배분된다고 삼성은 설명했다. 평가이익 배분율에 따르면 계약자와 주주의 몫이 2 대 8이지만 처분이익에 따르면 6 대 4로 역전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삼성생명의 회계처리가 논란이 된 것은 감독당국의 관련 규정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내 생보사는 삼성생명과 마찬가지로 평가이익의 일부를 주주 몫으로 배분해 왔다.

삼성생명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회계처리상 ‘부채’를 ‘자본’으로 포장해 기업가치를 부풀릴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분식이나 위법은 아니다. 오히려 명확한 회계처리 규정을 미리 마련하지 못한 금융감독 당국의 책임이 더 크다.

파문이 커지자 금융감독원은 6일 “이 문제는 특정 회사와 관련된 문제는 아니고 삼성생명의 회계처리 방식이 감독규정 위배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한발 물러섰다. 금융감독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이 부위원장이 진작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폭탄성 발언을 한 것 같다”며 “해프닝으로 봐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일과성 돌출행동으로 치부하기엔 후유증이 너무 컸다. 한 기업의 이미지는 물론 감독당국의 신뢰도 크게 훼손됐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고위인사는 말 한마디에도 신중해야 한다.

배극인 경제부 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