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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과거의 노무현이 아니다’

입력 | 2004-03-08 19:10:00


노무현 대통령은 며칠 전 민주노총 새 지도부와 만난 자리에서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으며 진보와 보수로 양분하던 시대가 끝난 것 같다. 재야 시절, 국회의원 시절의 노무현이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 1년의 학습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학습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에 비춘다면 너무 많은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진즉에 알았어야 했다. 국가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은 무(無)이념이어서도 안 되지만 이념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더구나 철지난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틀에 갇혀서는 결국 국민통합은커녕 세상을 대립과 갈등으로 찢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 시끄럽고 국민 피곤하고 ▼

정권의 진보적 성격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변화가 시대적 요구라면 진보는 그 흐름이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는 상호보완적 개념일 뿐이다. 보수를 배제하는 진보란 급진의 자기실패로 치달을 위험성이 크다. 이분법의 함정은 곳곳에서 깊다. 더구나 깊은 함정에 빠질수록 배타성과 독선의 독(毒)은 치명적이다.

이를테면 너희는 부패하고 우리는 깨끗하다는 식이다. 깨끗하다 앞에 ‘상대적’이란 말을 붙인다 해서 배제의 논리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오히려 우리가 부패했다고 한들 당신들의 ‘10분의 1’을 넘겠느냐고 하는 것은 ‘우리의 부패’쯤은 차라리 당당하지 않으냐는 기만의 어법(語法)이 될 수 있다. 이런 어법은 진보가 쓰는 게 아니다. 아니, 이런 데에 진보냐 보수냐를 갖다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열이 부패하면 보수고 하나 부패하면 진보인가. 우스운 얘기다.

3김 이후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란 이제 더 이상 불법과 특권이 일상적 부패구조와 맞물려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주의의 맹목성에서 벗어나 한발씩이라도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한층 높여 분단의 조건에서나마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보다 확고히 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패한 정치를 개혁해야 하고 지역으로 갈라진 국민을 통합해 나가야 한다. 경제를 살려 체제의 토대를 굳건히 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국민의 에너지를 한 데 모아 나가야 한다. 여기에 무슨 대단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한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흔들릴 수 없는 두 기둥이라고 전제한다면 그 안에서 설득과 타협으로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확대해 나가면 될 일이다.

이 일을 감당하는 것만도 노 정권 5년으로는 벅차다. 그런데 소중한 1년을 진보네, 혁명이네 하며 까먹었다. 쓸데없는 말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국민을 피곤하게 했다. 그렇잖아도 시대 변화에 따른 진통이 내연(內燃)하고 있는 터에 대통령이 편을 갈라 반목과 적대를 심화시켜 왔으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2.9%(추정치) 성장의 초라한 경제성적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물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지도자에게 실천적 행위 없는 이론적 인식은 별 무소용이다.

▼‘비판적 지지’ 등 돌리게 해 놓고 ▼

문제는 인식의 깊이와 진정성이다. 인간의 인식 변화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노무현의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 ‘나도 변했다’를 구체적 행동을 보여 주는 것 외에 없다면 그걸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어 보인다. 힘들다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나 달려가서야 노무현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이들의 절망을 키울 뿐이다. 이미 그들은 지난 1년 사이 너무 많이 실망해 왔지 않은가.

다시 희망을 불러오려면 눈앞의 총선에서부터 의연해져야 한다. 진득하게 유권자의 심판을 기다리고 그 뒤의 일은 민의(民意)에 따르겠다는 겸허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위법이라고 했으면 정치논리를 앞세운 선거운동을 더는 고집해서는 안 된다. 야당이 내세우는 탄핵 근거의 당위성 여부는 둘째 문제다. 대통령이 선관위의 결정을 무시해 결과적으로 국가의 기본 규범인 헌법 정신을 훼손한대서야 ‘노무현이 변했다’고 한들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