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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두번 죽이는 ‘문화지구’?…홍대앞 유흥가 번창

입력 | 2004-03-09 19:11:00


홍익대 앞 ‘실험예술’의 메카로 자리 잡아 온 소극장 ‘씨어터 제로’가 최근 폐관 위기를 맞자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누드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22일 홍대 정문 앞 거리에서는 심철종 ‘씨어터 제로’ 대표(연극연출가)를 비롯한 화가, 연극인, 무용가, 언더그라운드 가수 등 1000여 명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죽어가는 순수문화’를 애도하는 뜻에서 상여를 짊어지고 대규모 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특히 상주(喪主)를 맡은 심씨와 전위예술가 무세중씨를 비롯, ‘인디문화’와 ‘실험예술’을 대표하는 젊은 문화예술인 50여명이 ‘누드 퍼포먼스’를 펼칠 계획이다.

1998년 11월 개관해 그동안 무용과 퍼포먼스 등 3200여 회의 실험적 공연을 선보였던 ‘씨어터 제로’가 갑자기 문 닫을 위기에 몰린 것은 서울시가 지난해 홍대 앞 지역에 대한 문화지구 지정계획을 발표한 뒤 부근 땅값이 평당 1000만 원 이상 폭등했기 때문. 이후 술집 노래방 카페 등 유흥업소들은 더욱 늘어난 반면 임대료 상승으로 소극장과 갤러리 등 ‘인디문화’를 대표하던 대안문화 공간들은 하나둘씩 밀려나고 있다.

‘씨어터 제로’도 지난해 5월 건물 소유주가 바뀐 뒤 새 주인이 건물 재건축을 위해 퇴거를 요구해와 법정소송에 들어갔다. 마포구청이 이미 건축허가를 내주었기 때문에 4월 중순경 극장을 비워줘야 할 처지다. 마포구청측은 다른 시유지나 구유지 공간을 임대해 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극장 측의 요청을 검토 중이나 형평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심철종 대표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도 5년 동안 꿋꿋이 지켜온 극장을 이제 ‘문화지구’ 때문에 넘겨줘야 한다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가다가는 홍대 앞이고 대학로고 간에 겉만 문화지구지 소비문화에 밀려 공연장들이 ‘도미노’ 식으로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탄식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문화지구’는 2000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지역문화 육성 정책의 하나로 도입된 제도. 현재 서울 인사동 지역이 문화지구 1호로 지정됐으며, 올해 홍대 앞과 대학로 일대가 차기 문화지구 대상지역으로 검토되고 있다. 문화지구로 지정되면 문화지구 안에 있는 각종 문화시설 및 업종들이 조세와 부담금을 감면받게 되고 건축기준도 완화된다. 그러나 문화지구 지정 검토 발표를 전후로 땅값이 폭등하고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면서 되레 문화예술인들은 발붙일 곳이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이와 관련, 문화관광부는 최근 홍대 및 대학로 예술인들과 함께 ‘문화지구 활성화 TF팀’을 꾸려 두 차례 회의를 갖는 등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문화부 공연예술과 나경환 사무관은 “이 제도가 문화예술 활성화에 목표를 두고 있는 만큼 지자체와 현장예술인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있지만 ‘씨어터 제로’의 경우 사유재산권에 관한 문제인 만큼 우리도 난감하다”고 밝혔다.

‘대안공간 루프’ ‘쌈지스페이스’ 등 홍대 앞에 근거를 둔 29개 문화예술단체들로 결성된 ‘홍대앞 문화예술인 협동조합’ 대표 조윤석씨는 “당국의 ‘문화지구’ 지정 검토가 오히려 음식점이나 술집, 카페만 불러들이고 있다”며 “부동산 투기 바람에 문화예술인들이 다 쫓겨나기 전 문화예술 공간에 대한 보호대책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문화지구 지정이 문화발전과 예술인들에게 별다른 실익을 주지 못한다면 제도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